[아침을 열며]역사의 아이러니

  • 입력 1996년 11월 10일 20시 27분


오랫동안 근대적인 인간은 너무나도 오만했다고 할까, 역사는 인간이 예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역사의 발전단계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고 앞으로 찾아올 역사의 단계는 이런 것이라고 뚜렷하게 제시했으며 그런 사회를 이룩한다고 많은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다. ▼권력욕에 눈먼 「투사」들▼ 지난 89년 11월 누구도 예견하지 못한 가운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가 깨어지자 적지않은 역사가들이 망연자실한 것 같이 보였다. 그러자 이제는 오늘의 역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가 「인간이 만들고자 한 역사와는 다른 역사가 나타나는 요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이란 그들이 만들고자 한 역사와는 다른 역사를 만들고 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가을이 더욱 깊어가고 이 해도 저물어 간다. 그래서일까, 나도 어느덧 한국 현대사를 더듬고 이 한 해를 반성하면서 역사란 정말 인간이 이룩하는 것이면서도 그 인간이 뜻한 바와는 아주 다른 것이라는 생각에 잠기게 된다. 왜 그럴까. 그런 역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후의 역사, 4.19후의 역사, 민주화 이후의 역사가 모두 그런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그리스의 명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가 그려낸 영화의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의 장대한 걸작 「유랑극단의 기록」도 그런 것이지만 확실히 그의 영상세계에서는 그날을 꿈꾸었지만 찾아온 그날은 그날이 아니었다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되풀이해서 강조되고 있다. 최근에 본 「벌의 나그네」라는 작품도 그랬다. 전쟁과 혁명의 세대인 초로의 신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집안에 전해져 온 전통적인 가업을 이으려고 벌통을 트럭에다 싣고 꽃을 찾아서 나그네길을 떠났다. 그러나 어떠한 현실에도 적응할 수 없었던 그는 끝내 모든 벌통을 뒤집어엎고 스스로 벌떼의 습격을 받아 죽고 만다. 왜 전쟁과 혁명의 시대에 그렇게 동경했던 역사는 찾아오지 않았는가. 사실 한국의 오늘에 대해서 우리가 묻고 싶은 것도 그런 물음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민주화를 위해서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싸워온 분들도 왜 마찬가지로권력욕과 물욕에 눈이 어두워지고 정쟁에만 골몰하게 됐을까 묻지 않을 수 없다. 내년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그런 추한 모습이 더욱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민주화세력 어디 있나▼ 정말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나타나는 역사의 요인을 우리도 물어야 하겠다. 아무리 선한 싸움이라고 해도 싸움이라면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음모도 있고 중상도 있고 때로는 폭력도 있다. 그렇다면 선한 싸움을 싸운 측이 승리하고 민주정치의 날이 왔다고 할 때 그런 부정적인 방법은 완전히 극복되는 것일까. 성스러운 이념이 사라진다면 관습처럼 돼버린 지금까지의 추한 수단과 방법만이 남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모든 혁명은 실패한 혁명이라고까지 정직한 역사가는 조심스럽게 기록했던 것이다. 다시금 나치스에 저항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를 상기하게 된다. 「우리는 잃게 되었단다/비천함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뜨린다는 것을/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한다는 것을」(김광규 역). 이런 자기비판이 없다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들도 부패하고 퇴폐하고 만다. 그럴 때면 「벌의 나그네」에서 처럼 지식인은 절망하고 국민은 등을 돌린다. 문민정부 3년 9개월의 오늘, 그때 그 민주화 세력은 어디에 서 있는가 묻고 싶어진다.지 명 관<한림대교수·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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