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김창덕]구조조정 필패 공식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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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덕 산업부 기자
김창덕 산업부 기자
 지난달 21일 대한항공은 오후 늦게 긴급 이사회를 열어 한진해운에 매출채권을 담보로 600억 원을 빌려주기로 결정했다. 그보다 꼭 보름 전 한진그룹이 조양호 회장의 사재 400억 원과 함께 물류대란 수습용으로 내놓겠다고 발표한 그 돈이었다.

 대한항공은 당초 한진해운의 롱비치터미널 지분(54%)을 담보로 잡았지만 2대 주주(46%)인 스위스 해운사 MSC와 금융사들을 설득하지 못해 자금 지원이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담보를 매출채권으로 바꾸기로 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강한 질책이 있은 뒤였다. 박 대통령은 같은 달 13일 국무회의에서 “기업이 회생 절차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정부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식은 결코 묵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진그룹을 몰아붙였다. 대통령까지 나서자 한진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채권단도 다르지 않았다. 한진해운에는 단 한 푼의 자금도 더 지원할 수 없다고 못 박았던 KDB산업은행은 대한항공이 ‘백기’를 든 다음 날인 22일 500억 원 추가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대통령의 물류대란 조기 수습 발언이라는 ‘면책특권’을 얻고서야 산은이 움직였다는 얘기가 나왔다.

 8월 31일 시작된 한진해운발 물류대란은 이미 3주를 넘긴 시점이었다. 대책 마련이 늦어지면서 화주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고 한진해운 선원들은 바다 한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돼야 했다.

 한국 산업 구조조정의 가장 큰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장면으로 꼽을 만하다. 정부, 금융권, 대상 기업 중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보신주의’ 얘기다.

 한국 경제는 구조조정의 묵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구조조정은 다수의 실업자를 양산할 뿐 아니라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 또한 만만치 않게 든다. 이 과정에서 잘못된 진단, 잘못된 결정을 최소화하는 게 성공적인 구조조정의 핵심이다.

 하지만 최악의 시나리오는 훗날 불거질 책임론이 두려워 누구도,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이다. 사태 수습의 기회마저 놓쳐버린다면 피해는 더 커질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최고 권력자가 모든 의사 결정 과정마다 ‘오케이(OK)’ 사인을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난달 말 철강과 석유화학 산업에 대한 민간 컨설팅 보고서의 전체적 윤곽이 발표됐을 즈음 한 정부 관계자는 “사실 정부가 더 오랫동안 관련 산업 현황을 연구해 와서 컨설팅회사보다 파악하고 있는 내용이 더 많다”고 했다. 그래선지 정부가 발표한 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이나 해외 컨설팅 회사들의 보고서 내용은 큰 차이가 없었다. 뒤집어 보면 컨설팅 보고서들은 정부 정책 입안자의 책임을 덜어주는 수십억 원짜리 명분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명분을 얻는 데 금쪽같은 수개월의 시간이 소요됐다.

 한국 경제의 미래를 결정지을 구조조정은 분명 고차원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난제다. 지금의 구조조정 주체들이 자기 몸만 사리느라 ‘필패 공식’만 대입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김창덕 산업부 기자 drake007@donga.com
#대한항공#한진해운#조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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