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주먹으로 다시 시작하는 삶… “정부는 어디 갔나” 분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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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81년만의 대지진]
[비극의 카트만두/이유종 특파원 현지 르포]

이유종 특파원 현지 르포
이유종 특파원 현지 르포
28일 오후부터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폭우가 쏟아졌다. 도무지 나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길거리에 천막을 세우고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았을 이재민들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튿날인 29일 날이 밝자마자 밖으로 나섰다. 무려 27개 텐트촌이 세워졌다는 카트만두에서 이재민이 제일 많이 모여 있다(약 1만 명)는 툰디켈 공원을 찾았다. 공원 전체가 텐트로 가득했다. 텐트라고 해봐야 비닐 천 쪼가리를 나뭇가지로 세워 묶은 것들이었다. 바닥은 종이와 천 등을 깐 게 전부였다.

급속한 경제성장기에 태어난 기자는 배고픔을 모르고 자란 세대이다. 부모 세대의 가난이라야 6·25전쟁이 끝난 후 빈민들이 모여 있는 판잣집 사진을 보는 간접 체험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만난 가난의 현장은 너무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인간의 삶이 과연 이렇게 무너져도 되는 것인가….

대학생이라는 프레이티 골탐 씨(26·여)는 조부모, 부모를 포함한 가족, 친인척 30여 명과 함께 천막 하나에 의지하며 살고 있다. 지진 첫날인 25일 집에서 식구들과 밥을 먹다 땅이 크게 흔들리고 벽이 갈라지자 입던 옷 그대로 뛰쳐나왔다고 했다. 여동생은 돌에 맞아 크게 다쳤지만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고 했다.

골탐 씨 가족은 그날 오후 2시 바로 이 공원으로 왔다. 첫날은 그대로 땅바닥에서 밤을 보냈다. 하루 종일 물 한 방울 먹지 못했다. 이튿날인 26일에야 네팔의 적십자사로부터 천막을 지을 기본 재료들을 받았다고 했다. 골탐 씨는 “어제 내린 비를 쫄딱 다 맞았다. 너무 추워 밤새 한숨도 못 잤다”고 했다.

목욕은 고사하고 세수도 못하고 화장실 시설도 제대로 없다 보니 공원은 악취로 가득했다. 배고픔과 절망에 지친 사람들은 차마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원 곳곳에서 나무로 불을 피우고 음식이 될 만하다 싶으면 모든 걸 불에 올려 구워 먹었다. 정오에 인도 소속 구호단체에서 국수와 밥을 나눠주자 너도나도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아수라장이 됐다.

대지진이 할퀴고 간 카트만두는 매우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서서히 일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공원에서 도심 방향으로 3km 정도를 걸었다. 여전히 부서진 건물들은 덩그렇게 방치돼 있었지만 비가 그치고 날씨가 화창해서인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카트만두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라는 타멜에 도착했다. 환전소, 기념품가게, 옷가게 등 일부 가게들이 문을 열었다. 깨진 유리창과 엉망이 된 진열장을 정리하는 가게 주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관광객을 상대하는 음식점 한두 곳도 문을 열었다. 전기와 물도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나온다고 했다. 일부 상점에서는 인터넷이 간헐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등산용품점을 운영하는 풀 바하드라이 씨(38)는 “평소 같으면 등산 성수기라서 관광객들로 붐벼야 하는데 지진 때문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했다.

얌부 호텔의 매니저 유브라즈 차울라가인 씨(22)는 “새로 들어오는 관광객은 거의 없다. 고객이 절반 이하로 크게 줄었다. 주변 호텔도 마찬가지다. 상당수 호텔이 단전, 단수로 고객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후에는 택시를 타고 타멜에서 남부 사트도바토, 동부 트리부반 공항 등을 원형으로 40∼50분 정도 돌았지만 시내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제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있는 네팔인들은 서서히 정부를 향해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다.

툰디켈 공원에서 만난 수만 카다 씨(25)는 “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이 있다는 신문 기사도 봤는데 누구도 구호물자를 전달하지 않고 있다. 지원 물자를 나눠 줄 수 없다면 그게 정부인가? 지금 네팔에는 정부가 없다”고 타국의 기자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네팔인들은 대지진 자체도 충격이지만 지진 이후 정부의 허술한 대처야말로 또 다른 재앙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부는 사망자들이 어디에 얼마나 묻혀 있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구호팀이 도착해도 이를 컨트롤하는 타워조차 부재한 상황이다.

이러다 보니 지진 발생 후 네팔인 대부분은 모든 문제를 자신들 손으로 해결해야 하는 처지이다. 구호에 나서고 있는 사람들도 민간인이 많았다. 타멜 거리에서 유니폼을 입고 고무장갑과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고 있는 20, 30대 청년 50여 명이 보여 말을 걸었더니 ‘모국 네팔을 위한 젊은이의 운동’ 소속 회원들이라고 했다. 수닐 카드카 회장은 “지진이 발생한 뒤 즉시 구조작업에 참여했다. 인명 30여 명을 구했다”고 주장했다. 기자가 ‘왜 민간단체들만 이런 구조 및 구호 작업에 나서느냐. 네팔 정부가 제 구실을 못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난처한 표정이었다.

툰디켈 공원에서 공원관리 업무를 부여받았다는 한 군인은 “28일 오후 1시 공원으로 와 쓰레기를 치우고 텐트 치는 것을 돕고 화장실도 설치했다”고 했다. 그에게 “왜 지진이 난 지 사흘 만에야 왔느냐”고 물었더니 “기본적으로 시청 공무원들이 해야 할 업무다. 늦게 연락받은 것에 비하면 우리는 그나마 빠르게 대처한 것”이라고 답했다.

사람들은 네팔 하면 365일 눈이 쌓여 있는 하얀 히말라야 고봉들에 둘러싸인 낭만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 이면에는 대지진을 가져온 땅의 지각변동만큼이나 불안한 정치적 지각변동이 수십 년간 거듭되어 왔다.

수백 년을 통치해온 전제 왕정이 2001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무너지긴 했지만 제대로 된 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총선을 치른 게 불과 7년 전인 2008년이었다. 이후 여러 정당의 분쟁에 볼모로 잡히는 정치적 소용돌이는 계속됐다.

하긴 종족 수만 126개, 고유 언어만 128개인 데다 물리적으로 교류가 힘든 산악 지형은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기에는 너무 열악한 조건들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에 인도처럼 힌두교 신자가 대부분이다 보니 수십 개의 카스트(계급차별)가 상존하고 있다.

어떻든 네팔은 현재 제대로 된 헌법조차 없으며 기본적인 도로조차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경제 상황이 열악하다. 수도 카트만두만 해도 지진 이전에 하루 14시간씩 단전을 겪었다.

외국의 원조와 총 인구 4분의 1에 이르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 힘들고 천한 일을 도맡아 하면서 국내 가족들에게 보내오는 해외 송금이 나라의 주된 수입원이다. 그러니 아무리 세계 지진학자들이 지난 수십 년간 네팔 대지진을 정확하게 예보해봐야 대비책을 세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네팔 수실 코이랄라 총리는 대지진이 터질 무렵 암 재발 여부를 체크하기 위해 해외 체류 중이었다. 그는 지진 발생 닷새째를 맞는 29일(현지 시간)에야 TV에 나와 “앞으로 사흘간을 국가 애도기간으로 선포하겠다”고 했다.

네팔은 2020년까지 최빈국에서 개발도상국 대열에 진입하는 것을 국가적 목표로 세웠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향후 재건 비용만 5년간 네팔 국내총생산(GDP)의 절반(1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돈도 돈이지만 재건 작업을 주도할 사람과 시스템이 없는 게 더 큰 문제다. 과연 이 나라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인가.

카트만두=이유종 기자 pen@donga.com
#네팔#대지진#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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