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커 전 美연준 의장 “美 모든 면 엉망진창…지도층 믿음 사라져”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24일 16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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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이 나라의 지도층에 믿음을 갖지 않는다면 어떻게 민주주의를 운영하겠다는 건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 ‘인플레 파이터’로 명성을 날린 미국의 경제 원로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91)이 23일(현지 시간) “우리는 모든 면에서 엉망진창(hell of a mess)”이라며 미국에 쓴소리를 했다. 볼커 전 의장은 지미 카터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때인 1979~1987년 연준을 이끌었으며 당시 오일쇼크에 따른 살인적 인플레를 잡기 위해 금리를 20%까지 끌어 올렸다. 은행의 자기자본 투기성 거래를 제한하는 규제인 ‘볼커 룰’로 유명한 경제 원로다.

그는 이날 공개된 뉴욕타임스(NYT)와 인터뷰에서 “정부에 대한 존경, 대법원에 대한 존경, 대통령에 대한 존경, 이 모든 것이 사라졌다. 심지어 연준에 대한 존경까지도. 이는 정말로 나쁘다”고 우려했다. 미국 정치권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브렛 캐버노 연방 대법관 인준 논란, 연준의 금리 인상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공개적인 불만 등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된다.

볼커 전 의장은 이달 말 회고록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당초 다음달 책을 낼 계획이었지만 그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출판사 측이 시기를 앞당겼다. 그는 “나는 책을 쓸 의도가 없었지만 괴롭게 하는 일이 있었다”며 “이 나라 통치체제(governance thing)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핵심적 문제는 우리가 금권정치(plutocracy)에 빨려들고 있다는 것”이라며 “자신들이 똑똑하고 건설적이어서 부자가 됐다고 확신하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엄청난 부자들이 있다. 그들은 정부를 좋아하지 않고 세금 내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오늘날 워싱턴은 로비스트와 싱크탱크에 의해 장악됐다고 말했다. 볼커 전 의장은 회고록에서도 “법안과 선거 절차에 영향을 주기 위해 ‘워싱턴 늪(swamp)’에 쏟아져 들어오는 수천 명과 수억 달러의 돈을 효과적으로 막을 방도가 없다”고 적었다. 그는 다음 금융위기에 대한 걱정도 빼놓지 않았다. 은행의 안정성에 대해 “그들이 과거보다 훨씬 강해졌지만 그들이 얼마나 조작을 하고 있는지를 난 모른다는 게 솔직한 답변”이라고 말했다.

전직 대통령과 인연도 소개했다. 연준의 금리 인하를 노골적으로 요구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회고록에 1984년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옆 서재로 불려가 레이건 대통령과 제임스 베이커 비서실장을 만난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레이건 대통령은 아무 말이 없었고 베이커 비서실장이 ‘대통령은 선거 전에 금리를 올리지 말 것을 당신에게 지시하고 있습니다’라는 쪽지를 건넸다”고 전했다. 볼커 전 의장은 “나는 놀랐다”며 “서재로 부른 건 집무실과 달리 녹음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나중에 들었다”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볼커 전 의장에게 경제와 규제 정책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재무장관을 맡을 의향이 있는지 묻기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과는 당선 전에 두 번 만난 것이 고작이다. 그는 1987년 연준 의장에서 물러난 뒤 길을 걷고 있을 때, 트럼프가 ‘헤이 폴, 난 도널드 트럼프라고 해요’라며 말을 걸어와 처음 만났다고 소개했다. 두 번째 만남은 볼커 의장이 트럼프 대통령이 출연하고 있는 TV프로그램 ‘어프렌티스(견습생)를 통해 자선단체 기부금을 모금하기 위해 만났는데, 성공적이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볼커 전 의장은 NYT와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는 아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영리하게 미국 노동자들의 경제적 고충을 포착했다는 점은 인정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은 엘리트들이 무시한 문제를 붙들었다”고 말했다.

뉴욕=박용특파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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