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타당한 유럽, 12월 4일 또 한 차례 ‘운명의 날’ 맞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14일 20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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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3일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와 11월 8일 미국 대선에서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성향의 지도자들에게 연타당한 유럽이 12월 4일 또 한 차례 '운명의 날'을 맞는다. 이탈리아의 개헌 국민투표와 오스트리아 대선이 동시에 열리는 이날은 올해 혼란이 수습 국면으로 갈지, 걷잡을 수 없는 폭풍으로 확대될지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탈리아 개헌안은 상원의 권한과 규모를 줄이고 행정부의 힘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마테오 렌치 총리가 제안했다. 렌치 총리는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될 경우 총리직을 내놓겠다는 뜻을 밝혔다. 현재로선 개헌 반대 여론이 높다. 청년실업률이 40%에 육박하는 데다 렌치 총리의 기득권 이미지도 개헌안에 힘을 실어 주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중도 좌파 성향의 렌치 총리가 물러날 경우 2018년 총선이 앞당겨 치러지게 되며 이 경우 극좌 성향의 오성운동과 극우 야당 북부동맹 등이 선전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로 이들 포퓰리즘 성향의 극좌와 극우 야당들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트럼프 당선 직후인 12일 렌치 총리가 시장을 지낸 피렌체에서는 북부동맹 지지자 수천 명이 모여 트럼프와 마테오 살비니 북부동맹 대표가 함께 찍은 사진을 들고 "렌치 총리 물러나라"라며 시위를 벌였다. 오성운동을 창당한 베페 그릴로도 "아웃사이더가 세상을 한발 앞서 나가게 한다"라며 트럼프의 승리에 환호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이탈리아는 트럼프가 한 명이 아니라 살비니와 그릴로 두 명이기 때문에 미국보다 더 복잡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두 야당은 모두 EU에 부정적이다. 로마 루이스대의 지오바니 오르시나 교수는 "국민투표가 부결될 경우 이탈리아는 한동안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각오해야 하며 내년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 선거에서도 유럽은 큰 혼란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같은 날 치러지는 오스트리아 대선에서는 제2차 대전 이후 유럽 최초의 극우 대통령이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 반(反)난민, 반유럽연합(EU)을 외쳐 일찌감치 '유럽의 트럼프'로 불려 온 자유당의 노르베르트 호퍼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중도 좌파의 무소속인 알렉산더 판데어벨렌에게 2~4%포인트 꾸준히 앞서고 있다. 이곳에서도 트럼프 당선이 호퍼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응답(58%)이 판데어벨런 후보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전망(14%)을 압도하고 있다.

대선 전 트럼프를 한목소리로 비판하던 유럽은 막상 트럼프가 당선되자 미국 눈치를 보며 각자도생의 길을 모색하는 분위기다. EU와 독일은 "포스트트럼프 시대에 유럽이 한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라며 13일 긴급 외무장관 회의를 소집했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불참해 시작부터 김이 샜다. 보리스 존슨 영국 외교장관은 EU보다는 미국과의 양자 관계 개선에 더 공을 들이는 분위기다. 민족주의 성향의 오르반 빅토르 정부 출범 이후 EU와 사사건건 대립하며 트럼프를 지지해 온 헝가리도 회의 불참을 선언했다.

이날 동유럽에서는 유럽의 원심력을 강화하는 선거 결과가 잇따라 나왔다. 옛 소련 위성국인 몰도바 대선에서 친(親)러시아 성향의 이고르 도돈 사회당 후보가 52.4%를 얻어 집권 여당인 '행동과연대당'의 마이아 산두 후보(47.6%)를 제치고 당선을 확정지었다. 도돈은 2014년 EU와 체결한 협력 협정을 무효화한 뒤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관세동맹에 가입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같은 날 실시된 불가리아 대선에서도 친러 성향 루멘 라데프 사회당 후보가 59.4%를 획득해 36.2%를 얻은 유럽발전시민당의 체츠카 차체바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라데프 당선자는 당선 직후 "유럽 차원의 러시아 제재를 해제하겠다"고 말했다. 친러 성향의 대통령 등극은 러시아의 동유럽 팽창에 잔뜩 긴장하고 있는 유럽으로서는 또 하나의 악재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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