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트로스 갈리 전 유엔 사무총장 별세…한반도와도 깊은 인연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17일 07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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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사무총장 중 두 번째,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이후론 첫번째 방북한 유엔 수장
1993년 12월 북핵 위기 때 ‘평화 중재자’ 역할 기대 안고 평양 갔으나
‘유엔연합사 해체, 평화협정 대체’라는 엉뚱한 요구만 듣고 빈손 귀국

향년 94세로 별세한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전 유엔 사무총장(6대)의 한반도와 인연은 각별하다. 북한을 방문한 역대 2번째 유엔 사무총장이다. 북한을 최초로 방문한 유엔 사무총장은 오스트리아 출신인 쿠르트 발트하임이다. 그는 1979년 5월 2, 3일 평양을 방문해 당시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같은달 5일 서울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따라서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1991년) 이후 북한을 방문한 유엔 사무총장은 현재까지 부트로스갈리 전 총장이 유일하다. 한국인인 반기문 유엔사무총장(8대)은 방북을 추진하다가 지난달 북한 4차 핵 실험 때문에 무기한 연기된 상태다.

부트로스갈리 총장은 북핵 위기가 고조되던 1993년 12월 24~26일 평양을 방문했다.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올라갔다. 당시 국제사회는 유엔 사무총장이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중재자 또는 해결사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크게 주목했다. 그러나 북한은 그런 기대를 저버렸다. 당시 김영남 외교부장(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24일 부트로스갈리 총장을 위한 연회에서 “유엔의 역할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실천적 조치를 취하는 것, 즉 유엔연합사를 해체해서 유엔과 북한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바로잡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당시 김일성 주석도 부트로스갈리 총장과 만남에서 “북한은 미국과 핵문제에 관해 협의를 계속하고 있다. 유엔이 이 문제에 직접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부트로스갈리 총장은 “유엔연합사 해체 문제,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뀌는 문제가 논의되려면 먼저 한반도 평화가 이룩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당시 서방 언론 등의 평가는 “북핵 문제 해결의 중재자 역할을 하러 갔다가 ‘유엔사부터 해체하라’는 엉뚱한 주문을 받고 왔다”는 비판론이 많았다. 한마디로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왔다’는 얘기다.

부트로스갈리 총장에 앞서 1979년 5월 평양을 방문했던 발트하임 총장은 당시 김일성 주석에게 “한반도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반도 문제 해결 과정에서 당사자인 한국을 제외하는 건 불가하다”며 ‘사무총장이 지명한 인사가 남북한 쌍방의 대화 통로로서 옵서버 역할을 하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서는 “김일성이 ‘북한은 남침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고 전하기도 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그동안 꾸준히 ‘역대 사무총장으로서 3번째이자 자신의 첫 평양 방문’을 추진해왔으나 북한의 갑작스런 방문 취소 결정이나 핵 실험, 미사일 발사 등의 도발로 방북 실현 가능성이 점점더 희박해지고 있다. 유엔 안팎에선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의견이 대세다. 반 총장의 방북 추진이 앞서 두 사무총장 때보다 더 큰 기대와 주목을 받아온 이유는 반 총장이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같은 한국말로 반 총장과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회담을 한다면 어느 총장 때보다 밀도 있고, 내용 있는 논의가 될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유엔 소식통들은 “반 총장의 방북이 당초 북한 의도대로 지난해 말에 성사되고 그 직후인 1월 핵 실험과 2월 미사일 발사 도발이 이어졌으면 반 총장뿐만 아니라 유엔의 국제적 위상도 크게 떨어졌을 것”이라며 “방북이 불발된 게 결과적으로 반 총장이나 유엔으로선 다행이란 시각이 많다”고 말했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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