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형준]‘위안부 진실’ 귀막고 눈가린 日언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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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도쿄특파원
박형준·도쿄특파원
일본 16개 역사학 단체 회원 6900여 명이 “위안부 왜곡을 그만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로 한 25일 오후 2시 반. 발표 예정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쿄(東京) 중의원 제2의원회관에 들어섰지만 벌써 한국 특파원 예닐곱 명의 모습이 보였다. 발표 장소인 회의실이 협소해 20명 정도 들어가면 꽉 찰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다들 서둘러 온 길이었다.

배포된 출입증을 목에 걸고 뛰다시피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서니 웬걸, 텅 비어 있었다. 곧이어 기자회견이 시작됐지만 대부분 한국 기자들뿐이어서 여기가 서울인지 도쿄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일본 기자라고 해봐야 아사히신문과 NHK방송 정도였다.

일본 기자들의 무관심은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매일 오전과 오후 한 번씩 하는 정례기자회견 자리에서도 확인됐다. 각종 현안에 대한 정부의 공식 입장이 나오는 자리라 모든 현안이 망라되는데 역사학 단체의 공동 성명에 대해 질문을 한 일본 기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더 놀란 것은 이튿날(26일) 조간신문이었다. 동아일보를 포함해 많은 한국 신문이 1면에 싣는 등 비중 있게 다뤘지만 일본 신문은 아사히신문과 도쿄신문만 작은 박스 기사로 처리했다.

성명을 낸 사람들이 일본 내에서 비주류 혹은 소수파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회원 규모나 영향력 면에서 분명 다수파이자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본 언론의 무관심은 이해가 안 갔다. 이번 성명을 주도한 구보 도루(久保亨) 역사학연구회 위원장은 “우리는 소수의 우익도 좌익도 아닌 상식적인 생각을 가진 다수 역사학자들의 의견을 반영한다”고 했다.

더구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2012년 말 총리가 된 이후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수정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정치문제화해선 안 된다. 역사학자들의 판단에 맡겨두겠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가 궁지에 몰릴 때마다 입버릇처럼 핑계를 대 온 대상인 역사학자들이 이번에 단체로 성명을 낸 것이다.

일본 언론은 왜 침묵하는 것일까. 기자회견장에서 만난 한 일본 기자는 “역사학자들의 정치력이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들의 목소리가 아베 정권에 도달하기 힘들다. 아베 총리가 이들의 주장을 듣고 자신의 사고를 바꿀 가능성도 ‘제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니 16개 단체 역사학자들이 “사실(事實)로부터 눈 돌리지 말라”고 촉구한 대상에 정치인뿐 아니라 미디어도 포함됐다는 점이 이해가 갔다. 역사학자들은 25일 성명에서 위안부 강제연행은 많은 사료에 의해 실증돼 왔다며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는 무책임한 태도를 일부 정치가와 미디어가 계속하면 일본이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것과 같다”고 강조했다.

아베 정권을 향해 ‘돌직구 발언’을 날리다 외압으로 3월 방송에서 하차한 뉴스 해설가 고가 시게아키(古賀茂明) 씨도 본보와의 인터뷰(5월 19일자)에서 “일본 언론은 정권 눈치만 본다”고 개탄한 바 있다.

지난해 10월 한국 검찰이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을 불구속기소했을 때 일본 정부는 “한국은 언론 자유가 없는 나라”라고 맹비난한 바 있다. 과연 일본 정부는 한국을 향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되묻고 싶다.

박형준·도쿄특파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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