左로 가다 벼랑서 떨어진 英노동당… “중도 회귀” 목소리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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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만의 총선 참패… 黨 내분
親기업 블레어노선 철저히 배격… 부자증세-기업규제 공약 앞세워
중진들 “극좌실험, 끔찍한 실수… 중도노선 버리면 집권 어려워”

영국의 전통 깊은 좌파 정당 노동당이 7일 총선에서 참패를 한 이후 당내 이데올로기 싸움이 내전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민심을 무시하고 이념에 집착해 온 ‘올드(old) 좌파’ 정책을 버리고 중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번 선거를 지휘한 에드 밀리밴드 당 대표는 지난 세 차례 총선에서 노동당을 승리로 이끈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신(新)노동당’ 노선과 결별하고 노동계급과 노조 등 전통적인 ‘핵심 좌파’ 지지층에 호소하는 전략을 썼다. 그러나 선거 결과 보수당보다 100석 가까이 뒤지는, 1987년 이후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자 바로 물러나야 했다.

선거가 끝나자 그의 노선에 대한 당내 중진들의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노동당의 피터 맨덜슨 의원(전 산업부 장관)은 “노동당에서 실종된 것은 경제 정책이었다”며 “당이 1980년대로 회귀하는 ‘끔찍한 실수’를 했다”고 비판했다. 블레어 전 총리도 “노동당이 약자에 대한 보살핌뿐 아니라 기업가들의 야망과 열망을 위한 당이 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밀리밴드는 이번 총선에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과 싸우기보다는 ‘블레어의 신노동당’이라는 당내 인사들과 싸웠다”고 분석했다.

노동당 안에서는 그동안 친기업 중도노선의 ‘블레어주의자’와 전통적인 좌파 정책을 수호하려는 ‘브라운주의자’(고든 브라운 전 총리 노선) 간의 첨예한 갈등이 있어 왔다. 2010년 브라운 총리의 총선 패배 후 이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당내 경선 과정에서 벌어진 ‘형제의 난(亂)’이었다.

형인 데이비드 밀리밴드 외교장관(49)은 블레어주의자였고, 동생인 에드 밀리밴드(45)는 브라운주의자였다. 노동당 의원들은 세련된 말솜씨에 국제적으로 명망이 있는 형 데이비드를 지지했으나, 노동조합이 막판에 조합원들의 표를 동원해 동생을 미는 바람에 에드 밀리밴드가 당을 이끌게 됐다. 당시 노조 세력의 지지를 받았던 닐 키녹 전 노동당 대표는 “우리가 드디어 노동당을 되찾아왔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에드 밀리밴드는 취임 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산층이 무너지고 양극화가 커지고 있다며 친기업 중도노선인 블레어의 ‘신노동당’주의를 버리고 기업에 대한 규제 강화, 사회적 복지비용 증대 등 ‘평등주의’를 기반으로 한 정통 좌파 노선을 택했다. 이라크전쟁 참여, 국민건강보험(NHS)의 부분적 민영화 등 블레어 총리 시절 노동당이 했던 일을 모두 폐기했다.

이어 에너지 가격 동결에서부터 부동산 임대 시장, 주택 건설, 담배산업, 헤지펀드에 대한 규제와 개입을 공약으로 내걸어 기업인들의 비판을 받았다. 여기에 ‘부자 증세’까지 내놓자 기업인들은 밀리밴드를 좌파 성향이 농후하다는 뜻의 ‘붉은 에드(Red Ed)’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13일 전국위원회를 열고 향후 당내 경선 일정을 잡고 새로운 얼굴 찾기에 나설 예정인 노동당은 현재 내분에 휩싸여 있다. 일부 좌파 인사들이 공공노조로부터 지지를 받아 조직력에서 앞선 앤디 버넘 전 보건부 장관(45)을 서둘러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중도파들은 “당 대표 경선을 가을 전당대회로 미뤄야 한다”고 반대하고 있다.

해리엇 하먼 임시 당 대표는 “2010년 대표 경선에 관여했던 노조의 영향력이 부당하게 남용되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해선 안 된다”며 “당권은 노조가 아니라 노동당이 결정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부 인사들은 미인대회식 경선 이전에 몇 개월이 걸리더라도 ‘좌파의 미래’에 대한 깊은 토론이 우선돼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놓고 있다. 블레어 총리 시절 연설문 작성가였던 필립 콜린스 씨는 “수렁에 빠진 노동당은 20년 만에 길고, 깊고, 고통스러운 자기반성과 대면해야 한다”며 “영국 좌파가 이번 참패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5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런던정경대 토니 트래버스 교수(정치학)도 “영국의 리더는 여전히 중도 진영에서 결정되는 구조”라며 “노동당이 중도에서 멀어질수록 상처는 더 커진다”고 진단했다.

노동당 추카 우무나 의원은 일간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노동당을 지지하는 데는 너무 부자도, 너무 가난한 것도 걸림돌이 될 수 없다”며 “노동당이 사회적 정의와 개인적 성공을 원하는 중도 성향 유권자들에게 성장에 대한 야망과 열정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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