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심층 포커스]외국 정상들의 ‘국민과의 소통법’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11일 03시 00분


코멘트

제조업 살리기 내세운 英총리, 공장에서 신년사 낭독

지난해 8월 미국 워싱턴 링컨기념관에서 열린 마틴 루서 킹 목사 연설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전현직 대통령들이 참석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미국 지도자들은 국민과의 소통에 도움이 되는 행사라면 언제든지 찾아간다. 왼쪽부터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대통령 부인 미셸 오바마,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동아일보DB
지난해 8월 미국 워싱턴 링컨기념관에서 열린 마틴 루서 킹 목사 연설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전현직 대통령들이 참석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미국 지도자들은 국민과의 소통에 도움이 되는 행사라면 언제든지 찾아간다. 왼쪽부터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대통령 부인 미셸 오바마,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동아일보DB
새해를 맞아 세계 각국 정상이 저마다 자국 국민을 상대로 소통 행보에 나서고 있다. 연두 기자회견에서부터 노변정담(爐邊情談),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까지 소통 형식도 더욱 다양하고 정밀해졌다. 정상들의 소통 행보는 국민에게 얼마나 먹혀들고 있을까.
송곳 질문 받고 선명한 메시지 전달

“올해가 당신의 임기 중 최악의 해라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오바마 케어(건강보험개혁안)에 관해 너무 자주 말 바꾸기를 한 것이 아니냐”….

지난해 12월 20일 미국 백악관 기자회견장. 각본 없는 송곳 질문들이 쏟아졌다. 답변이 부실하면 후속 질문이 집요하게 꼬리를 물었다. 이에 맞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특유의 농담을 섞어 가며 능숙하게 받아쳤다. 대통령과 기자단의 설전(舌戰)은 1시간 내내 이어졌다.

이보다 하루 앞선 지난해 12월 19일. 러시아 모스크바 세계무역센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장장 4시간 33분에 걸친 송년 기자회견을 열었다. CNN 등 전 세계 1327명의 기자가 참석해 81개의 질문을 쏟아 냈다. 푸틴은 2000년 취임 후 모두 9차례 이 같은 초대형 기자회견을 열었다. 2008년엔 5시간 동안 106개의 질문을 받아 최장시간 기록을 세웠다.

인터넷 시대답게 외국의 정상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를 폭넓게 활용한다. 또한 친근한 신년사로 국민에게 더 가깝게 다가서려고 애쓴다.

그러나 다수의 국민 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국정 어젠다를 가장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매체는 여전히 TV와 신문이다. 민주주의가 정착한 선진국에선 대통령과 총리가 이들 매체에서 활약하는 기자들에게서 공격적인 질문을 받기도 한다. 정상들도 이 같은 기자회견을 가장 강력한 소통의 무기로 활용한다. 이를 통해 본인의 의중과 메시지를 선명하고도 광범위하게 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선한 형식 찾아 공장에서 진행

중국 지도자의 대중 메시지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체제에 들어 탈권위적이고 친서민형으로 파격적으로 바뀌고 있다. 시 주석은 주석 취임 후 첫 신년 연설을 본인 집무실에서 진행했다. 마이크도 없었고 대본도 보지 않았다. 시 주석은 그동안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주석 집무실을 보여 주었다. 시 주석 뒤편 서가에는 부친 시중쉰(習重勳·작고)과 모친 치신(齊心), 부인 펑리위안(彭麗媛), 딸 시밍쩌(習明澤)와 각각 함께한 사진 4장을 배치했다. 미국 등 서방 지도자의 집무실과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신년사의 내용과 형식도 바뀌었다.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의 최근 10년간 신년사는 평균 1155자였지만 시 주석은 이를 759자로 줄였다. 후 전 주석의 신년사 제목은 ‘함께 손잡고 세계 평화와 공동 발전을 촉진하자’(2013년) 등 대외 메시지가 대부분이었다. 자국민들에게는 다소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반면 시 주석은 ‘오늘 개혁이 내일의 길을 마련한다’는 제목으로 반(反)부패 사정(司正)과 개혁·개방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호소했다. 시사평론가 두핑(杜平) 씨는 “시 주석이 관료적 언사나 사자성어 등 진부한 표현을 자제하고 구어체를 사용해 신선한 느낌을 준다”고 평가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올해 1월 1일 신년사를 촬영한 곳은 한 공장이었다. 그가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집무실을 벗어나 공장에서 신년사를 읽은 것은 일자리 창출과 제조업 살리기에 나서겠다는 메시지를 국민이 피부로 느끼게 하려는 의도였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일 주요 TV 채널을 통해 전국에 방영된 신년 연설을 두 차례나 사전 녹화했다. 이틀간 34명이 사망한 볼고그라드 테러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녹화했던 신년 연설에 테러 관련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12월 31일 방문한 러시아 극동의 하바롭스크에서 “소치 겨울올림픽을 앞두고 테러를 뿌리 뽑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긴 신년사를 재녹화했다.
기자회견은 ‘국민 소통의 꽃’

대통령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신년사도 있고, 텔레비전 쇼와 비슷한 ‘국민과의 대화’도 있다. 그러나 질문의 예리함과 진지함, 직접적인 소통의 측면에서 기자회견을 뛰어넘긴 힘들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주요 현안이 생길 때마다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기자회견을 한다. 지난해만 해도 3월 정부 지출 자동 삭감(시퀘스터). 8월 국가정보국(NSA) 개혁, 10월 연방정부 잠정폐쇄(셧다운), 11월 건강보험개혁안(오바마 케어) 부실 논란 등을 계기로 4차례 기자회견을 했다.

미국 대통령은 이 같은 이슈형 회견 외에도 1년에 3차례(연초, 연중, 연말) 정례 기자회견을 한다. 여기에 정상회담 후의 공동 기자회견(14회)까지 합치면 오바마 대통령의 지난해 기자회견은 모두 21차례. 그렇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기준으로는 기자회견에 인색한 대통령으로 통한다. 오바마 행정부 1기 4년(2009∼2012) 동안 기자회견 횟수는 79회로 조지 W 부시(89회), 빌 클린턴(139회), 조지 부시 전 대통령(143회)보다 적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비롯해 ‘성공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이들은 모두 기자회견을 공세적으로 활용했다. 미국을 대공황에서 구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무려 1023회의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노변정담식 라디오 연설을 통해서도 여론을 이끌어 갔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3분만 남는 시간이 있으면 기자들을 불러 회견을 할 것’이란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기자들과의 만남을 즐겼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기자회견을 한 첫 대통령이다.

프랑스의 대통령들도 TV를 소통의 통로로 적극 활용해 왔다. 우파였던 지스카르 데스탱,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은 수시로 기자들을 엘리제 궁으로 초대해 대담과 토론을 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도 취임 1개월 만에 기자들을 엘리제 궁으로 초대했다. 그런데 경기 침체, 측근 비리 문제 등으로 지지율이 바닥권인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TV 출연 횟수가 상대적으로 적다. 그보다 TV 회견을 더 꺼린 사람은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뿐이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매년 여름휴가를 떠나기 전에 정례 기자회견을 한다.
각본 없는 질문, 살 떨리는 시험대

2002년 11월 미국 추수감사절 날 백악관 앞뜰에서 열린 칠면조 사면(赦免) 행사에서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이 칠면조 한 마리를 앞에 두고 청중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이 칠면조가 약간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녀석이 아마도 자기가 기자회견을 앞두고 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백악관 참모와 청중 사이에서 폭소가 터졌다.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을 앞두고 있을 때의 대통령 심경을 빗댄 조크였다. 이처럼 기자회견은 대통령의 리더십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자칫 공개적으로 상처받는 장이 될 수도 있다.

한국 청와대의 기자회견은 질문 내용과 순서를 미리 조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 기자회견은 각본 없이 대통령이 손을 드는 기자를 직접 지명해 질문을 받는 형식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허핑턴포스트 기자가 특정 내용을 질문하도록 사전 합의했다가 큰 비난을 받았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질문할 기자를 지목할 때 직접 기자의 이름을 불러 친근감과 신뢰도를 높인다.

지난해 12월 19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송년 기자회견에서도 어김없이 민감한 질문들이 튀어 나왔다. “도덕적 가치를 내세우는 대통령이 왜 서방의 도덕 가치는 비난하는가”라는 CNN 기자의 질문에 푸틴 대통령은 “서방의 가치가 아니라 ‘가짜 가치’에 맞서 러시아를 지키려는 것”이라는 특유의 화법으로 능수능란하게 대답해 나갔다. 2008년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선출된 군주로 가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는 2007년 미국 CBS TV ‘60분’과의 대담에서 당시 부인이던 세실리아 여사와의 불화에 대한 질문을 받고 화를 벌컥 내며 인터뷰를 일방적으로 중단하기도 했다.

최장수 백악관 출입기자였던 고(故) 헬렌 토머스 기자는 생전에 “대통령 기자회견은 유일하게 대통령에게 질문하고 추궁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며 “대통령에게 질문할 수 없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파리=전승훈 raphy@donga.com
워싱턴=정미경 / 베이징=고기정 특파원
#외국 정상#국민 소통법#대통령#기자회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