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새 지도자 심층 비교]臥薪嘗膽 ‘와신상담’ 최고권력 오르기까지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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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천막당사 - 커터칼 피습… 역경 딛고 입지 키워
시진핑, 시골 근무로 바닥다져… 도련님 한계 극복
아베, 단명 총리 불명예 5년만에 씻고 총선 대승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과 시진핑 공산당 총서기,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는 모두 아버지에게서 정치를 배웠다. 권력 쟁취 과정은 조금씩 다르다. 박 당선인이 ‘자기희생’과 ‘중성적 카리스마’로 스스로 권력을 확보한 반면 시 총서기는 ‘바닥 다지기’로 도련님의 한계를 극복했다. 아베 총재는 부친의 권위와 강경 우익 발언으로 생존해 왔다.

박 당선인은 2004년 3월 ‘1.5선’ 국회의원으로 탄핵 역풍의 위기에 놓인 한나라당 대표를 맡았다. ‘차떼기당’의 오명을 떼기 위해 당사 매각을 발표한 뒤 ‘천막당사’로 나앉았다. 2년 3개월의 야당 대표 시절 흉기 테러를 겪으며 치른 2006년 지방선거를 비롯해 2004∼2006년 재·보선에서 ‘40 대 0’의 완승 신화를 이끌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칭과 함께 당내 1인자로 부상했다. 하지만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당시 후보에게 1.5%포인트 차로 석패했다.

시 총서기는 허베이(河北) 성 시골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시골 근무를 자원했다는 점에서 국무원 부총리의 아들로서는 파격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이때부터 시 총서기 특유의 친화력이 단련됐고 검증받았다.

아베 총재는 세이케이(成蹊)대 졸업 후 고베제강 평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3년 뒤인 1982년 11월부터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당시 외상의 비서관이 됐다. ‘장관 아버지-비서 아들’은 한국은 물론이고 부패가 일상화한 중국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그림. 그의 성장 발판을 마련해 준 것은 북한이었다. 2002년 9월 관방부(副)장관이던 그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총리를 따라 간 평양에서 “북한이 일본인 납치를 사과하지 않으면 평양선언에 서명해서는 안 된다”는 초강경 자세를 고집해 일본 국민의 뇌리에 각인됐다.

2007년 9월 그는 총리가 된 지 1년 만에 사임했다. 건강상의 이유를 내세웠지만 참의원 선거의 ‘역사적 대패’와 국정 혼란 책임으로 쫓겨난 셈이었다.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며 점차 잊혀져 갔다. 하지만 올해 8월 한국 중국과 잇달아 영토 분쟁을 빚으면서 사회가 우경화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극우 성향에 국민의 관심이 쏠리자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했고 총선을 승리로 이끌면서 두 번째 총리 등극을 눈앞에 두고 있다.

박 당선인이 최고 권력을 거머쥔 것은 특유의 고집과 카리스마 덕분이기도 하다. 그는 2011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4·11총선을 승리로 이끌며 ‘박근혜 대세론’을 확고히 한 뒤 8월 전당대회에서 득표율 84%로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시 총서기는 계파 구도에서 낙점된 측면도 있다. 태자당의 핵심이자 그와 호형호제하는 쩡칭훙(曾慶紅) 전 부주석이 총서기로 ‘기획 육성’한 것. 이 과정에서 태자당은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좌장인 상하이방(상하이 관료 출신 모임),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이끄는 공청단파와 대립과 협력을 반복해 왔다.

3국 지도자의 외교 스타일을 가늠하는 게 쉽지는 않다. 시 총서기가 강한 민족주의를 내걸 것으로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한 계파의 대표이자 7명으로 이뤄진 집단지도체제의 일원이다. 반대파 포섭 여하에 따라 총리 재임 기간이 결정되는 아베 총재는 소신보다는 내부 정치를 외교에 어떻게 활용할지에 골몰할 것으로 보인다. 박 당선인은 외교적 대응에 가장 효율적인 대통령중심제의 수장이라는 지위를 충분히 활용해 자기 목소리를 만들어 갈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
#박근혜#시진핑#아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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