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5세대 지도부 인물-리더십 집중탐구]<3> 리커창… 30년을 준비한 2인자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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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청단 황태자 ‘리틀 후진타오’ 어느 총리보다 입김 셀듯

《 한때 ‘미래의 태양’이라고까지 불렸던 리커창(李克强)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은 국무원 총리 직을 맡아 형식적으로는 권력서열 3위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파워는 어느 총리보다도 막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제4세대 지도부가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원자바오(溫家寶) 총리-쩡칭훙(曾慶紅) 국가부주석 등 트로이카 체제였다면 제5세대 지도부는 시진핑(習近平)-리커창의 쌍두마차 시대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국가주석이 맡는 정치노선 및 외교 국방과 달리 총리가 맡는 내치와 경제가 갈수록 중시되는 것도 리커창의 힘을 강화시키는 배경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
○ 시류에 민감한 타고난 수재

리커창은 1955년 7월 안후이(安徽) 성 허페이(合肥) 출생이다. 후 주석, 우방궈(吳邦國) 상무위원, 왕양(汪洋) 광둥(廣東) 성 서기도 안후이 성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수재였다. 1968년 들어간 허페이 바중(八中)은 4년제 대학 진학률이 80% 이상인 명문이었다. 문화대혁명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자 아버지의 주선으로 유명한 한학자 리청(李誠)의 문하로 들어가 사기(史記) 등 한학을 배웠다. 1977년 대입 시험이 부활하자 29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베이징(北京)대에 합격했다. 법학과 정원은 81명에 6개 반이었는데 그는 가장 성적이 좋은 1반에 들어갔다.

리커창은 공부뿐 아니라 대학 학생회 활동도 열심이었다. 학생대표로 있으면서 천윈(陳雲), 펑전(彭眞) 등 혁명원로를 초청해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동시에 개방적인 베이징대의 학풍에도 맞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1930년대 영국에 유학해 헌정(憲政)과 다당제를 주장한 궁샹루이(공祥瑞) 교수의 수제자로 총애를 받았고, 동기이자 미국으로 망명한 반체제 인사인 왕쥔타오(王軍濤) 등과도 친했다. 하지만 대학 친구 팡줴(方覺·미국 망명)는 “리커창은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베이징대의 민주화운동을 5차례나 붕괴시켰다”고 말했다.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뭐라도 포기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한 말로 보인다.

○ 논문은 학계 최고상… 치적도 많아

공청단파(공산주의청년단 출신)를 두고 ‘3다3소(三多三少)’라는 말이 있다. 재경(財經) 부문 이외의 전문가는 많은데 재경 방면은 적고, 지방 지도자 출신은 많은데 중앙 요직 경험자는 적고, 고학력자는 많은데 현장 실무 경력을 쌓은 이는 적다는 것이다.

하지만 리커창은 예외다. 그가 1985년 쓴 ‘중국 경제의 3원 구조를 논한다’는 중국 경제학계의 최고상인 ‘쑨예팡(孫冶方) 경제과학상 논문상’을 받았다.

리커창은 앞서 베이징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 기회를 포기하고 공청단에 들어간 뒤 16년간을 일했다. 1993년에는 역대 최연소(38세)로 부장급(장관급)인 공청단 제1서기에 임명됐다. 일찍부터 중앙 경력을 쌓은 셈이다.

공청단에서 그는 낙후된 빈곤 지역에 학교를 지어주는 등의 희망공정(希望工程) 사업을 정착시켰고, 이를 기반으로 1999년 역시 최연소(44세)로 농업중심지인 허난(河南) 성 성장, 2004년에는 공업중심지 랴오닝(遼寧) 성 서기를 맡아 농업과 공업 행정을 두루 경험했다. 허난 성장 시절 31개 성 가운데 28위(1990년대 초 기준)였던 1인당 소득을 18위(2004년)로 끌어올려 놨다. 또 그가 처음 주창한 ‘중원굴기(中原굴起·중부권 발전론)’는 중앙정부가 채택해 적극 추진할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랴오닝 성에서는 ‘동북 진흥 계획’을 적극 추진했으며 주택 184만5000가구를 개량한 것이 치적으로 거론된다.

○ 30년간 최고지도자 준비했건만…

그가 후계 경쟁에서 밀린 이유는 무엇보다 당내 구도가 불리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는 1983년 공청단 중앙학교 부부장 겸 전국학련(學聯) 비서장으로 발탁됐다. 당시 후 주석은 공청단의 중앙서기처 서기였다. ‘후-리’의 스승-제자 관계가 형성된 게 이때부터다. 리커창은 당시 2년 5개월간 후 주석과 한 사무실에서 일했으며, 이후 공청단 제1서기로 있던 5년(1993∼1998년)간 당 중앙서기처 서기였던 후 서기를 보고라인을 통해 상사로 모셨다. ‘리틀 후’ 리커창이 출세가도를 달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베이징대 법학과 동기들과 리커창 부총리(뒷줄 오른쪽)가 1977년 베이징대 법학과에 입학한 뒤 동기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베이징대 법학과 동기들과 리커창 부총리(뒷줄 오른쪽)가 1977년 베이징대 법학과에 입학한 뒤 동기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하지만 공청단파의 냄새가 너무 풍긴다는 것, 그리고 한 계파에서 연속 최고 지도자가 나온 적이 없다는 논리가 그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아울러 후난 성 에이즈 감염 혈액 수혈로 인한 에이즈 창궐과 뤄양(洛陽) 대화재(311명 사망), 랴오닝 성 탄광 폭발(214명 사망) 등 그의 재직시절 발생한 대형 사건사고도 오점으로 남았다. 천하를 쥘 듯했던 리커창도 ‘머리 내민 새가 먼저 총 맞는다(槍打出頭鳥)’는 중국 속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스스로 머리를 내민 것은 아니었지만 ‘선두주자’는 ‘머리를 내민 새’로 간주되지 않을 수 없었던 셈이다.

○ 경제체제 개혁 ‘글쎄’

중국 경제가 커짐에 따라 총리의 역할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더욱이 다음 10년은 원자바오 총리가 못다 한 경제체제 개혁에 나설 때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총리 리커창’이 팔을 걷어붙이고 과감한 개혁에 착수할 것이라는 전망은 많지 않다. 중국의 원로 경제학자 마오위스(茅于軾) 씨는 “차기 지도부는 변화의 요구에 직면해 있지만 (경제에 대한) 당의 지배력을 줄이면서까지 개혁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진핑과는 기본적으로 협력 관계를 유지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계파의 이해에 따라 각을 세울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베이징=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
#중국#리커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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