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 보복으로 200만명 아사… 사라진 소국 ‘비아프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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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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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지도자 오주쿠 26일 사망 계기로 재조명

《 “이회창 대표(당시 신한국당)의 장남 정연 씨는 179cm의 키에도 불구하고 원래 깡마른 체격으로 친구 사이에서 ‘비아프라’란 별명이 따라다닐 정도였다.” (1997년 7월 26일자 동아일보 A1면) 》
비아프라(Biafra). 당시 정확한 뜻도 모른 채 무심코 넘겼던 이 단어에 담긴 아픈 역사가 26일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비아프라는 아프리카에서 ‘잠시’ 존재했던 국가다. 이곳을 이끌던 한 노(老)정객이 26일 숨을 거뒀다. 만 3년(1967년 5월∼1970년 1월)도 못 돼 지구상에서 사라진 나라를 세상은 왜 아직도 기억할까. 뉴욕타임스는 “세월이 지나도 씻기지 않는 핏빛 비극, ‘비아프라의 눈물’이 화인(火印)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영국 런던에서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오두메구 오주쿠는 말 그대로 ‘은스푼을 물고’ 태어났다. 나이지리아 최고 거부였던 아버지를 둔 덕에 사치의 극을 맛봤다. 영국 유학 시절 옥스퍼드대 친구들은 그를 “최고급 스포츠카를 타며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린 바람둥이”로 기억했다. 졸업 뒤 고국에 돌아온 오주쿠는 180도 변한다.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군에 투신해 복무하며 동족 ‘이보(Ibo)족’의 현실을 깨닫게 됐다.

당시 나이지리아는 주류인 하우사와 요루바, 이보 등 세 부족으로 구성된 나라였다. 인구 5700만 명 가운데 800만 정도였던 이보족은 정치적 종교적 불평등에 시달렸다. 특히 1960년대 이보족 지도자의 석연치 않은 암살이 잇따르자 불만은 더욱 커졌다. 타고난 친화력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하던 오주쿠는 자연스레 이보족의 중심에 섰다.

결국 오주쿠가 이끈 이보족은 1967년 5월 30일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비아프라 공화국의 탄생이었다. 하우사족이 강하게 반대했지만 막을 명분이 없었다. 게다가 남부 원유산업을 장악한 탄탄한 경제력은 외교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탄자니아와 잠비아, 가봉 등 주위 국가와 국교를 맺으며 국제사회의 승인도 얻어 나갔다.

오두메구 오주쿠
오두메구 오주쿠
그러나 행복은 너무나 짧았다. 겨우 한 달 남짓 만에 하우사족이 침공을 결행했다. 전쟁 초기 대등했던 무게추는 ‘소련’이 개입하며 하우사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비아프라의 원유를 탐냈던 소련이 막대한 무기와 군비를 나이지리아에 지원한 것. 프랑스의 외교적 지지뿐이었던 비아프라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후 1970년까지 비아프라는 지옥이었다. 사망 군인은 양측 합쳐 약 10만 명. 그런데 하우사족의 ‘봉쇄 궤멸 작전’ 아래 비아프라 국민은 극한의 배고픔에 허덕였다. 1년 사이 200만 명 이상이 아사(餓死)했다. 전체 민족 가운데 4분의 1 이상이 사라진 것이다. 이 가운데 50만 명은 7세 이하 어린이들. 심할 땐 하루 6000여 명이 죽어 나갔다. 당시 팔다리가 앙상한 채 배만 볼록 나온 비아프라 아이들의 사진은 ‘아프리카 가난’의 상징이 됐다. 비아프라는 결국 항복을 선언했고 1970년 1월 15일 나이지리아에 다시 흡수됐다.

패전 뒤 강제 추방된 오주쿠는 영국 등을 떠돌며 세월을 보냈다. 가는 곳마다 이보족을 구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1990년대 수십 년 만에 나이지리아 정부의 해제로 귀국한 뒤엔 평생 이보족 빈민구제에 온몸을 투신했다. 아버지의 재산 역시 모두 쏟아 부었다. 오주쿠는 생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보족은 아프리카의 ‘이스라엘 민족’이다”라며 “고통과 억압의 길고 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언젠가 기적을 마주하리란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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