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라덴 사살]‘음지의 지배자’ 빈라덴… 사우디 사업가 출신 ‘알카에다 1인자’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5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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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모든 것 혐오” 9·11테러 주도

‘지구촌 최고 몸값’ ‘미국을 떨게 한 사나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 ‘서방 세계의 공공의 적’….

그의 수식어는 화려했다. 최근 10년간 세계질서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미국 시사주간 타임이 매년 발표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도 수시로 이름을 올렸다. 공개석상에 단 한 번도 나선 적이 없는 인물로는 유일했다. ‘음지의 지배자’였던 셈이다.

오사마 빈라덴. 미국을 죽도록 싫어한 그는 뜻밖에 자본가 집안 출신으로 한때 스스로 기업을 운영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의 건설 갑부로 22명의 부인과 54명의 자녀를 뒀다. 빈라덴은 1957년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배다른 형제가 많았을 뿐 친동생이 없어 외로웠다고 한다. 사우디의 지다에서 공부하던 빈라덴은 16세 때부터 이슬람단체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졸업 후 상속받은 건설회사를 운영했다.

그의 결혼생활에 대해선 알려진 게 별로 없다. 로이터에 따르면 17세 때 시리아 사촌과 처음 결혼했으며 최소 5명의 부인과 23명의 자녀를 뒀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그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지도자의 13세 딸과 결혼했으며 다른 2명의 부인이 있다고 전해진다고 보도했다.

자금력은 실로 막강하다. 아버지로부터 3억 달러 상당의 유산을 물려받았고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에서 은행과 시멘트공장 등을 통해 거액을 벌었다고 한다. 러시아 마피아와 연대해 마약 유통에도 관여했고 이슬람 추종자들로부터 기부금을 받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빈라덴이 이슬람 근본주의 ‘전사’로 나선 첫 무대는 아프가니스탄. 1979년 옛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하자 그는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아랍 의용군을 무장시키고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를 조직해 소련군에 맞섰다. 1989년 소련군이 아프간에서 철수하자 사우디로 돌아왔으나 1994년 이집트와 알제리의 과격 이슬람단체 테러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사우디 국적을 박탈당했다. 이후 수단으로 건너가 건설업을 재개했으나 미국 정보기관으로부터 테러단체를 지원한다는 의심을 받았고 미국과 유엔의 압력을 받은 수단 정부가 그를 추방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의 반미 성향은 굳어졌다.

빈라덴이 ‘미국의 적’임을 자칭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1996∼1998년 미국에 대한 지하드(성전)를 다짐하는 세 차례의 종교칙령을 통해 이슬람교도들에게 미국의 군인과 민간인을 살해하라고 촉구했고 미국인에게 사우디를 떠나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슬람 세상을 꿈꾸는 그에게 ‘최대 외세’로 인식된 미국은 최대 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공격이 “한쪽에선 테러이고 다른 쪽에선 지하드”라며 테러를 정당화했다. 이슬람을 위해서라면, 미국 타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정당하다는 ‘확신범’인 셈이었다.

그는 1995년 리야드 군기지, 이듬해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와 사우디 다란 군기지에서 잇따라 발생한 폭탄테러의 배후로 지목됐다. 이어 1998년 2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국대사관 폭탄테러에서도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 40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

전 세계를 경악시킨 2001년 9·11테러는 빈라덴과 미국 모두에 큰 전환점이었다. 배후로 지목된 빈라덴은 ‘테러의 상징’ ‘이슬람 저항운동의 영웅’이 됐다.

그러기를 10년. 그의 행방에 대해선 아프간과 파키스탄 등의 은신처를 오가며 숨어 지낼 것이란 ‘추측’만 무성할 뿐 ‘실체’는 오리무중이었다. ‘사망설’이 흘러나온 것만 해도 여러 번. 그때마다 그는 영상 메시지를 통해 건재를 과시하면서 반미 투쟁을 독려해 미국 정보망을 비웃었다. 2003년 9월 아랍어 위성방송 알자지라가 방송한 육성 테이프에서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며 9·11테러를 자랑하는 식이었다. 인공위성으로 지상의 야구공 하나까지 식별할 수 있다는 미국으로선 죽을 노릇이었다.

마침내 1일 ‘빈라덴과 미국의 10년 전쟁’은 막을 내렸다. ‘한 테러리스트의 사망’을 미국 대통령이 자정 가까운 시간에 긴급 발표하고 온 미국이 열광할 정도로 ‘21세기 초 불안한 세계’ 속에서 빈라덴의 위상은 ‘특별’했다.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 9·11테러 ::


2001년 9월 11일 오전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과 워싱턴 등에서 벌어진 사상 최악의 동시다발 테러. 이날 모두 4대의 여객기가 공중 납치됐다. 여객기 2대는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건물로, 1대는 워싱턴의 펜타곤(국방부)으로 돌진했다. 납치된 나머지 한 대는 펜실베이니아 주 상공에서 승객들의 저항으로 추락해 전원이 숨졌다. 총 희생자는 3000여 명(일부에선 2977명으로 집계하지만 정확하지 않음)에 달했다. WTC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미국은 테러의 배후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라덴과 그가 이끄는 테러 조직 알카에다를 지목했다.

:: 아프가니스탄전쟁 ::

미국은 9·11테러 직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오사마 빈라덴 체포에 나섰다. 빈라덴은 탈레반이 통치하는 아프가니스탄에 기지를 만들고 은신 중이었다. 탈레반은 빈라덴을 넘기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고 미국은 2001년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했다. 2001년 11월 탈레반 정권은 붕괴됐다. 하지만 잔당들의 저항이 계속됐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이어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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