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 속에 신음중인 두바이 르포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0월 19일 21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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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런 모래 먼지가 쌓인 조감도에서 야자나무 모양의 인공 섬을 보지 않았다면 이곳이 불과 1년 전 세계에서 '상상력의 극치'라 찬사를 받았던 팜 데이라 건설 현장임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11일(현지 시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의 '팜 데이라'. 4635만 ㎡나 되는 바다를 매립해 세계 최고급의 관광레저 시설과 고급 거주지를 만들려고 했던 이 곳에는 개발의 굉음 대신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바닷바람이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 바람과 엉켜서 내는 소리만 요란했다.

약간의 부지 조성 및 매립 공사만 진행된 채 멈춰진 건설 기기들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고, 공사 자재들은 아무렇게나 나뒹굴어져 있었다. 인부들과 바다를 매립하는 데 필요한 모래를 실어 나르는 트럭들로 붐벼야 할 공사장 입구에는 녹이 슨 철제 경비실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팜 데이라에서 자동차로 약 40분을 달려 도착한 '두바이랜드' 건설 현장. 사막 한가운데 디즈니랜드의 약 8배 크기의 세계 최대 테마파크를 만들겠다는 현장에는 놀이기구, 동물원, 쇼핑몰, 공원, 호텔 같은 테마파크용 시설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두바이랜드라고 적힌 간판을 달고 있는 커다란 입구만이 이곳이 그냥 버려진 사막이 아니라 세계적인 개발 프로젝트의 현장임을 알게 해줬다.

지난달 26일 두바이 통치자인 무함마드 빈 라시드 알막툼은 미국 켄터키 주에서 열린 한 승마대회에 참가해 "우리(두바이)가 돌아왔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25일 방만한 개발전략으로 자금난을 겪던 두바이 재무부가 최대 국영 회사인 두바이월드와 자회사 나힐의 채무 상환을 6개월 간 유예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터진 이른바 '두바이 쇼크'에서 마침내 탈출했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기자가 1년만에 다시 둘러본 두바이의 '세계 최초', '세계 최고' 개발 프로젝트 현장들은 아직도 쇼크의 후유증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 신기루처럼 사라진 장밋빛 청사진들

"두바이는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다'는 경제학의 기본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 물류 허브를 넘어서 관광 및 금융허브로 도약이라는 혁신적인 개발전략과 비전을 제시한 뒤 외부에서 투자를 끌어와 인프라를 공급하면 수요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는 장밋빛 생각만 했던 것이다."

중동의 대표적인 싱크탱크인 걸프리서치센터(GRC)의 사미르 프라단 수석 연구위원은 " 두바이가 이룩한 성과가 결코 '모래성'은 아니지만 아직 위기는 끝나지 않았고 두바이는 지나치게 파격적이었던 개발 전략을 수정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두바이 시내 한 고층빌딩의 11층에 위치한 그의 연구실 창문 너머로도 공사가 중단된 대형 공사장들이 많이 보였다.

두바이의 대표적인 초고층 빌딩 밀집 지역인 비즈니스 베이는 '선 공급, 후 수요' 전략이 실패한 사례다. 사막 한가운데 대형 오피스타운을 개발해 다양한 글로벌 기업과 금융회사들을 대거 유치하려 했던 이곳은 두바이가 잘 나가던 시절에는 야간에도 불을 밝히고 공사를 진행하는 건물들이 많아 공사 중에도 화려한 야경을 뽐냈다.

그러나 취재기자가 1년 만에 찾은 비즈니스 베이의 야경은 크게 바뀌었다. 멈춰진 크레인, 불빛 없는 빌딩, 인부와 공사 장비가 없는 공사장을 쉽게 볼 수 있다. 쇼크 발발 전후로 투자자들이 투자를 포기했거나 보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한 건설사가 최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비즈니스 베이에서 현재 공사가 시작된 건물 115개 중 57개(49.6%)가 공사 중단 상태다. 또 공사 계획은 있지만 아직 착공도 하지 않은 건물도 100개 정도 된다.

두바이의 경제·사회적 수준과 법치주의 확립이 다른 중동 국가들처럼 글로벌 스탠더드에 크게 못 미친다는 것도 두바이의 개발전략을 어렵게 만든 이유로 꼽힌다.

다국적 부동산 컨설팅 회사인 CBRE 두바이지사의 매튜 그린 리서치팀장은 "해외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한다면서 정부가 성장률, 부동산 가격 추이, 공실률 같은 기본적인 경제통계조차 정기적으로 발표하지 않아 정확한 시장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운 게 두바이의 현실"이고 지적했다.

그는 "경기가 좋을 때는 이런 점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쇼크가 터진 뒤에는 두바이가 다시 투자를 이끌어내는 것을 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법치와 투명성의 확립없이 금융허브로 도약하기는 불가능 하다"고 말했다.

● 지도자 혼자 뛰어서는 지속적인 성장은 불가능

"두바이 쇼크로 얻은 큰 교훈은 두바이 현지인들이 두바이의 개발과 성장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지 최대 일간지인 걸프뉴스의 경제담당 에디터 사이푸르 라만 씨는 "지도자 한명이 모든 발전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게 위기를 통해 확인됐다"며 "정부, 공공기관, 언론사 같은 사회 핵심 섹터에 두바이의 인재들이 더욱 많이 진출해 장기적인 비전과 책임을 가지고 정책을 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통치자인 알막툼은 전 세계를 다니며 두바이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투자를 끌어 오는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정작 두바이 국민은 이를 뒷받침할 역량이 안됐다는 뜻이다.

약 150만 명인 두바이 인구 중 현지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20% 정도 밖에 안 된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특별한 일을 하지 않은 채 정부의 넉넉한 지원금을 바탕으로 '편안하게' 생활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부와 언론도 최상위층 인력들만 현지인들이고 그 아래 인력들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두바이를 떠날 수 있는 외국인들인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두바이의 미래에 대해서 애정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끝까지 희생할 자세가 돼 있지 않다. 걸프뉴스의 경우도 200명이 넘는 기자 중 현지인은 5명이 채 안된다.

투자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는 현지인 알 팔라히 씨는 "그동안 인적투자에 대한 관심이 너무 낮았던 게 사실"이라며 "돈과 인력 모두를 두바이 밖에서 끌어오는 방식의 경제개발은 지속성도 없고 위기에 너무 취약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각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바이=이세형기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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