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서 입 열면 죽는다…” 러 ‘法 허무주의’ 심각

  • 입력 2009년 8월 4일 02시 59분


증인 피살-납치 잇따라… 법치 신뢰 무너져
증인 절반 협박 받아… 보호 프로그램 역부족

러시아 전직 경찰인 발레리 카자코프 씨가 지난해 여름 괴한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한다. 모스크바 인근 푸시키노 시 검찰청사 앞을 향하던 그에게 어디선가 총탄이 날아왔다. 쓰러진 그에게 또 다른 괴한이 달려들어 날카로운 흉기로 마지막 숨을 끊어놓았다. 오후 3시 거리 한복판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당시 카자코프 씨는 시장의 부패와 관련한 내용을 진술하러 가던 길이었다.

최근 카자코프 씨를 죽인 범인이 경찰에 체포됐다. 카자코프 씨 가족은 살인범의 배후에 시청 고위 관계자가 있다는 의심을 지우지 않고 있다. 그의 아내는 “체포된 살인범의 입을 막기 위해 누군가가 살해하려 할 가능성도 있다”며 “러시아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깨끗하지 않다”고 말했다.

카자코프 씨처럼 러시아에서는 법정 증언을 앞둔 증인들이 괴한의 습격이나 납치, 살해, 방화 등의 피해에 시달리는 일이 잦다. 최근에는 인권운동가와 정부를 비판해 온 언론인들까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법조인 출신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지난해 취임 후 ‘법치의 회복’을 주요 국정과제로 내세웠지만 국민 사이에는 법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사법 허무주의(legal nihilism)’가 확산되고 있다고 2일 LA타임스가 보도했다.

과거 독재와 사회주의를 경험한 러시아에서는 지금도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마피아 범죄가 끊이지 않는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가 석유와 천연가스를 바탕으로 벌어들인 거액의 ‘눈먼 돈’들이 각종 뇌물 스캔들을 부추겼고 이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각종 형사 재판과 관련해 법정 진술을 하는 증인의 수가 한 해 무려 1000만 명에 이를 정도라고 한다. 러시아 경찰에 따르면 이중 절반에 해당하는 500만 명이 신변의 위협을 느끼거나 실제 협박을 받고 있다고 한다. 겁에 질린 증인들이 진술을 번복하거나 철회하면서 범죄 척결에 실패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실정이다.

지난달 러시아 인권운동가 나탈리야 예스테미로바 씨, 안드레이 쿨라긴 씨 등이 잇따라 괴한에게 납치 살해된 후 국제사회의 비판 여론도 높아지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러시아 내무부는 2006년 시작한 경찰의 증인 보호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이 혜택을 보는 대상자는 불과 한 해에 2만 명 수준에 그친다. 인권운동을 해온 올가 코스티나 변호사는 “경찰이 범죄자와 결탁한 경우가 많다 보니 증인이 보호를 요청하는 것 자체에 겁을 내고 있다”며 “도움이 되기는커녕 문제만 커진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고 말했다.

경찰이 성공적인 증인 보호 사례로 꼽는 베라 보브랴코바 씨도 막상 이 증인보호프로그램에는 진저리를 낸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경찰이 1차 재판 직후 증인 보호 업무를 종료해 향후 2차 재판 진술의 위험이 커졌다는 것이다. 정부가 그를 앞세워 대대적인 홍보 캠페인을 벌이면서 그의 목소리와 얼굴을 TV 화면에 그대로 내보내 신변 불안도 더 커졌다. LA타임스는 “법치를 세우지 못한 러시아의 실패는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지적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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