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의 전설’ 영원히 마이크를 놓다

  • 입력 2009년 7월 20일 02시 56분


18일 미국 워싱턴에 있는 언론박물관 뉴지엄의 대형 전광판에 전날 타계한 전설적 TV뉴스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의 사진이 올라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18일 미국 워싱턴에 있는 언론박물관 뉴지엄의 대형 전광판에 전날 타계한 전설적 TV뉴스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의 사진이 올라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미국이 가장 사랑한 언론인 월터 크롱카이트 타계

미국 TV 뉴스의 전설적 존재인 월터 크롱카이트 씨가 17일 타계했다. AP통신은 뇌혈관 질환을 앓아온 크롱카이트 씨가 이날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향년 92세. 그는 미주리 주 가족묘지 내 부인 묘 곁에 안장된다.

1962년부터 1981년까지 CBS방송의 간판앵커로 활동한 크롱카이트 씨는 객관적인 뉴스 진행으로 찬사를 받았다. ‘앵커맨’으로 처음 불린 것도 그였다. 1916년 미주리 주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학보사 편집자로 활약했다. 텍사스대를 중퇴한 뒤 여러 언론사를 거쳐 UPI통신의 전신인 UP통신 기자로 제2차 세계대전 전쟁터를 누볐다. 1950년 기자로 CBS에 입사한 그는 1962년 CBS의 간판 뉴스프로그램 ‘CBS 이브닝 뉴스’의 마이크를 잡았다.

그가 진행하는 뉴스를 보기 위해 1800만 명이 TV 앞으로 모여들었고 1981년 3월 6일 마지막 방송 때는 평소의 2배 이상이 시청했을 정도였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비롯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임으로 이어진 워터게이트 스캔들, 베트남전쟁, 아폴로 11호 달 착륙, 이란 인질사태 등 미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국민에게 전달했다.

그는 “책임 있는 언론인으로서 윤리는 언제 어느 때나 모두에게 공정할 수 있도록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이를 실천해 왔다. 수십 년의 방송 생활 가운데 그가 자신의 감정이나 주관을 방송에 이입한 것은 달 착륙 중계와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됐을 때 딱 두 번이었던 것으로 기록된다. 1969년 7월 20일 달 착륙 장면을 중계하던 그의 목소리가 떨렸으며 두 손을 마주 비비고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그는 “언론인답지 않게 흥분했다”고 스스로를 비판했다. 또 케네디 대통령의 서거 시간을 전하던 그는 목이 메었고 안경을 벗었다.

그는 1972년과 1974년 여론조사에서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사람’으로 꼽혔다. AP는 “그는 누구보다도 객관성과 절제된 동정심, 정확성을 강조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한쪽 편을 들면 시대를 변화시켰다”고 평가했다. 1968년 베트남을 방문한 그는 “우리는 종종 미국 지도자들의 낙관론에 실망한다”며 “미국은 베트남에서 수렁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이는 베트남전 여론을 바꾸는 계기가 됐고 결국 미군 철수로 이어졌다.

보도 당시 린든 존슨 대통령은 “나는 크롱카이트를 잃었고, 미국의 중산층을 잃었다”고 한탄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17일 성명을 통해 “크롱카이트는 앵커가 평가받는 기준을 설정했다”고 높이 평가한 뒤 “미국은 아이콘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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