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욕 사라진 일본 “구매력 살려라”

  • 입력 2009년 5월 27일 21시 27분


'소비 포화의 시대'를 맞은 일본에서 기업들이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 한창이다. 일본의 경제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 최신호는 소비자가 물건을 사지 않는 이유로 불경기보다 물건을 살 의욕이 사라진 탓이 더 크다고 지적한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모두 갖고 있는데다 저출산 고령화로 인구마저 줄고 있다. 고령화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져 저축을 우선시하게 된다. 높아진 환경의식은 대량소비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기술혁신으로 책이건 CD건 다운로드하면 되는 시대가 됐다는 점도 이런 흐름에 일조한다. '물욕 소멸'의 시대의 도래로 '소비 권유'도 보다 세심해지고 있다.

▽"쌓인 물건을 정리해줘라"=최근 일본의 소매업체에서는 고객이 새 물건을 살 경우 헌 물건을 되사주는 보상판매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대형 소매체인인 이토요카도가 지난해 말 5일간 양복과 코트 등 5개 품목에 대해 매출 5000엔마다 1점당 1000엔씩, 1인당 5점까지 되사주는 세일을 시작하자 무려 10만점이 몰려들었다. 지난달 말 보상판매 분야를 유리식기, 전자렌지 등 55개 품목으로 확대하자 1주일간 100만점 이상이 쇄도했다. 그것도 가격표도 떼지 않은 브랜드 상품이나 클리닝점 비닐에 싸인 양복 등 고급품이 몰려들어 업체를 놀라게 했다. 업체 측은 "버리기도 뭐하고 쓰지도 않는 물건을 사줘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받았다. 지난달 말까지 6차례 실시한 이 세일을 통해 소비자의 집에서 역류해온 물건은 모두 270여만 점. 같은 기간 이토요카도에서는 매출이 급속히 늘어 세일 경비를 충당하고도 남았다.

모방하는 기업도 속속 생겨났다. 오다큐백화점이 4월 헌 구두 한 켤레에 1050엔의 쿠폰을 발행하자 1~2만 켤레를 예상했던 매장에는 15만 점 이상이 모였다. 이 기간 신제품 매출은 신사화가 35%, 스포츠화가 60% 늘었다. 소비자는 집안이 물건으로 포화 상태지만 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집에 쌓여있던 물건들을 치워버린 고객은 다시 '소비자'로 돌아가 물건을 사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체험하게 하라"=가전업체 파나소닉은 신형 평판TV나 마사지 의자, 오디오세트 등 신제품을 '드림카'라는 트럭에 싣고 거리에 나가 고객들이 써 보게 한다. 지금 가진 제품으로도 아무 불편이 없는 고객들이 굳이 신제품을 찾아 매장에 갈 리 없기 때문. 지역매장에서는 전기 쿠킹히터의 장점을 알리기 위해 주부 요리교실을 열어 직접 사용해보게 함으로써 판매로 이어간다. 며칠 써보지 않으면 장점을 실감하기 어려운 마사지 의자나 제습기 등은 전시품을 빌려주기도 한다. 파나소닉의 매장 중 이 같은 영업 전략을 채용한 5600점은 5년간 매출이 1.3배 늘었다.

중고 명품점이 가방을 일정기간 빌려주는 렌탈서비스도 '일단 써보게' 하는 마케팅이다. 루이뷔통 구치 등 명품 가방을 10일간 상품가격의 4~5% 가격대에 빌려주고 마음에 들면 중고가격에 구매도 할 수 있게 했다. 빌려간 가방의 10% 정도는 그대로 판매로 이어졌다.

도요타 자동차는 지난해 여름 대학의 서클에 1개월간 무료로 자동차를 빌려주는 캠페인을 벌였다. 더 이상 자동차가 '동경의 대상'이 아니게 된 젊은이들에게 차를 가진 즐거움을 체험하게 하자는 의도다.

▽'소유'에서 '이용'으로=소비자 의식과 생활스타일이 변하면서 주택이나 자동차 가구 등도 판매에서 임대로 업계 지형도가 바뀌고 있다.

1950년대 이래 도쿄 남부와 요코하마(橫浜) 가와사키(川崎)를 잇는 전철을 운영하며 역세권에 분양주택과 상업시설, 레저시설을 지어 수익을 올려온 도큐(東急)전철그룹은 이 지역에 고령자 비중이 높아지자 올 2월 임대주택사업에 뛰어들었다. 새로 공급하는 임대주택은 젊은이들을 겨냥한 원룸이나 1LDK가 중심이다. 상권 유지를 위해서는 젊은 층을 유도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것. 1대의 자동차를 복수의 회원이 공용하며 이용시간에 따라 비용을 지불하는 '카 쉐어링'도 각광받고 있다. 소비자들이 물건보다 지식이나 체험, 추억, 타인과의 관계 등 소프트웨어에 돈을 쓴다는 점에 주목해 여행이나 외식 레저를 위한 상품들도 속속 개발되고 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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