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 9일째 아내는 빈젖을 물린채 숨을…”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5월 13일 02시 54분



스리랑카 피의 대학살 민간인 6500여명 희생
피란 오른 보트 피플도 바다서 죽거나 실종

더 피난할 곳도 없는 막바지의 공간. 총성과 포탄에 포위된 작은 땅덩이에서 본 바다 저 너머는 자유의 땅이었다.
시바다사 자와디스와란 씨의 가족이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 반군의 교전을 피해 피란길에 오른 것은 10개월 전. 침대 시트나 야자수 잎으로 만든 난민촌 천막 속 삶에 지친 그에게 선장은 “9시간이면 안전한 인도 해안가로 데려다 줄 수 있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길이가 6m도 안 되는 작고 낡은 배는 4월 중순 스리랑카 동북부의 마탈란 마을을 출발한 지 몇 시간 만에 엔진이 멈춰버렸다.
마실 물도 음식도 전혀 없는 배 위로 타는 듯한 태양이 작열했다. 사람들이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타는 갈증을 이기지 못해 바닷물을 마신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갔다. 자와디스와란 씨의 네 살배기 첫째 아들이 죽었다. 시체는 바다에 버렸다. 이어 장인이 눈을 감았고, 처남 2명은 땡볕 속 환각 상태에서 바다에 뛰어든 뒤 실종됐다. 9일째 되던 날 그의 아내는 생후 8개월의 둘째 아들에게 빈 젖을 물리다가 숨을 거뒀다. 표류하던 배가 인도의 한 어선에 발견되기 직전이었다. 당초 21명이 배에 탔으나 10명만이 겨우 목숨을 건졌다.
○ “민간인 학살은 범죄”
최근 뉴욕타임스가 전한 이 ‘21세기 보트 피플(boat people)’의 비극은 스리랑카를 미처 떠나지 못한 민간인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인지도 모른다. 오랜 내전에 시달려온 스리랑카에서 정부군이 타밀반군 진압에 나서면서 교전이 격해지고 있다. AFP통신에 따르면 9, 10일 정부군의 소탕 작전으로 물라이티부 지역에서 106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최소 430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확인됐다. 현지 의료진에 따르면 사망자는 이틀간 1000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자원봉사자들이 시체를 묻어주기 위해 판 구덩이에는 50∼60구의 시체가 한꺼번에 매장됐다. 부상자를 치료 중인 샨무가라야 박사는 11일 AP통신에 “1300명이 넘는 환자가 병원으로 몰려왔다”며 “중환자들도 치료를 거의 받지 못하고 있어 사망자는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은 이날 “스리랑카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피의 대학살(bloodbath)이 자행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수백 명의 민간인 학살 규모에 경악했다”며 강한 우려를 표명했고, 미 국무부도 “민간인 희생이 용납할 수 없는 수준까지 이르렀다”고 비판했다. 데이비드 밀리밴드 영국 외교장관과 베르나르 쿠슈네르 프랑스 외교장관을 비롯한 주요국 장관들은 긴급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청한 상태다.
○ 왜 죄 없는 아기까지…
스리랑카는 30년 가까운 내전으로 이미 7만 명이 희생당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새 정부가 분리 독립을 주장해온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를 상대로 최근 본격적인 소탕 작전을 펼치면서 반군은 동북부 물라이티부 항구까지 밀린 상태. 이번 기회에 국제 테러단체로 낙인찍힌 LTTE를 궤멸해 버리겠다는 것이 스리랑카 정부의 목표다.
문제는 무기를 잡지 않은 민간인들까지 양측의 싸움에 희생되고 있는 것. “공격하지 않겠다”는 상호 협정을 맺었던 난민촌 지역까지 무차별 공격을 당하고 있다. LTTE도 민간인을 방패로 이용하는가 하면 탈로를 봉쇄한 채 전투를 강요한 정황이 포착됐다. 뉴욕의 센트럴파크보다도 작은 3km²의 땅에 갇힌 5만 명은 양측의 공격에 속수무책이다. 유엔에 따르면 지난 석 달간 6500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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