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먼앞 거리 썰렁…정문경비 삼엄…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3월 10일 02시 57분



신치영 뉴욕특파원, 월가에 가보니

메릴린치 “루키 70% 날아가” 한숨

식당 손님 한산… 상가건물엔 “세입자 구함” 간판 즐비


“화려한 날은 가고, 절망에 가까운 무거운 분위기가 월가를 짓누르고 있다. 해고의 칼날이 춤추는 시기에 직원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미래에 대해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월가 투자은행 메릴린치 직원)

6일(현지 시간) 세계 금융의 중심지 뉴욕 맨해튼. 작년 9월 15일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파산보호 신청과 함께 본격화한 금융위기가 닥친 지 6개월에 즈음해 뉴욕 월가를 둘러봤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맨해튼 중심지 타임스스퀘어에서 7번가를 따라 몇 블록을 걸어 올라가니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고층 빌딩을 만났다. 옛 리먼브러더스 본사였다. 건물에는 리먼브러더스 간판은 온데간데없고 새 주인 영국계 바클레이스 은행의 이름이 달려 있었다.

작년 파산보호 신청 직후 이곳을 찾았을 때 10여 명의 경비요원이 정문을 지키고 취재진과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었다. 이날도 직원들의 표정이 어둡다는 점은 그날과 비슷했다. 출입하는 사람도 많지 않아 썰렁했다. 근처 길거리에서 핫도그 샌드위치 등을 팔고 있던 라미레스 씨는 “직원을 많이 해고해서 그런지 점심식사 시간에도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옛 리먼브러더스 본사에서 자동차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메릴린치 본사. 로어맨해튼 서쪽에서 허드슨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고층 건물은 경비가 무척 삼엄했다. 여러 명의 경비요원이 신분증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고 경찰차도 여러 대 보였다. 작년 말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인수되기 직전 임직원들이 거액의 보너스를 나눠 챙긴 일로 검찰 조사를 받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인 듯했다.

메릴린치 자산운용 부문에서 일하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사내 분위기를 물었다.

“작년부터 시작된 감원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 사업 부문에서도 입사한 지 2년 안팎의 ‘루키’들은 70%가 잘려 나갔다. 직원들은 하루하루 생존하는 데 급급하다.”

금융위기 이후 파산위기에 처한 금융회사들이 하나둘씩 국민 세금으로 구제받으면서 월가를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비난 여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감원의 칼날을 피한 직원들의 마음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BoA의 한 중간 간부는 “전에는 월가 금융회사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요즘은 누군가 ‘어느 직장에 다니느냐’고 물어오면 괜한 죄책감 때문에 대답을 제대로 못 한다”고 털어놨다.

메릴린치 본사에서 차로 10여 분 떨어진 월가 한복판에 위치한 AIG 뉴욕 빌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정도의 좁은 길 양편으로 하늘 높이 치솟은 고층 빌딩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저층에는 온종일 햇볕이 들지 않을 것 같은 AIG 빌딩 분위기도 침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점심시간이었지만 20여 개 테이블 가운데 손님이 앉은 테이블은 3, 4개에 불과했다. 식사를 주문받던 종업원은 “전에는 월가 금융회사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1시간 넘게 식사를 하고 갔는데 요즘은 별로 오지 않는다”며 “금융위기 때문에 월가 근처 식당들도 손님이 많이 줄었다”고 귀띔했다.

월가가 무너지면서 맨해튼 부동산 시장도 깊은 수렁에 빠졌다. 월가 근처 고층 아파트 건물과 상가 건물에는 ‘세입자 구함(For Rent)’이라는 간판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월가 근처에 ‘세입자 구함’이라는 대형 광고판을 내건 고층 아파트에 들어가 한 직원에게 “원 베드룸을 찾고 있는데 빈집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이 직원은 “전망 좋은 집이 몇 채 있다. 1년 계약을 하고 바로 입주하면 2개월 치 월세를 깎아주고 부동산 중개수수료도 물리지 않겠다”며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말했다.

며칠 전 뉴욕 일대 학교들이 휴교를 해야 할 만큼 많이 내렸던 눈은 거의 녹아버리고 찬란한 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월가는 여전히 ‘추운 겨울’이었다.

신치영 뉴욕특파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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