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中 옌볜조선족자치주
《3·1운동과 2·8독립선언은 잘 알려져 있지만 간도(間島)에서 일어난 3·13운동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3·13 반일(反日)운동은 당시 간도 주민의 3분의 1이 참여할 정도로 열기가 높았고, 뒤이은 무장투쟁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3·1운동 90돌을 맞아 독립투사들의 혼이 어린 역사현장을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 장세윤 연구위원, 김춘선 연변대 민족역사연구소 소장과 함께 돌아봤다.》
▼당시 일본총영사관 행진중 발포 17명 사망
청산리전투 등 간도 무장 독립항쟁 촉발시켜
항일 앞장섰던 명동학교 터는 옥수수 밭으로▼
당시 집회장소였던 조밭에는 4층 유치원이 들어서 있었다. 주변은 5, 6층 아파트와 상가가 빼곡히 들어선 거리로 변했다.
주최 측은 당초 융신(永新)학교 운동장에서 대회를 열려고 했지만 일제의 압력을 받은 중국 지방당국의 불허로 어쩔 수 없이 학교에서 800m 떨어진 허허벌판에서 집회를 가져야 했다. 이곳이 간도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3·13독립운동의 발상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 뜨거웠던 민중 참여 열기
이 지역에서는 시위가 없었던 마을이 별로 없을 정도로 3·13반일시위 운동의 민중 참여도는 드높았다.
특히 3월 13일의 첫 시위는 국내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큰 대회였다. 시위엔 당시 옌볜 지역 30만 동포의 10% 정도가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포고문과 공약삼장의 낭독이 끝나자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대회 장소에서 1km 떨어진 간도일본총영사관 앞으로 행진했다.
하지만 영사관을 300m 앞두고 중국군이 총격을 가했다. 시위대의 앞에서 깃발을 들고 가던 명동(明東)학교 공덕흡 학생 등 17명이 사망하고 48명이 부상했다.
이날 집회를 계기로 옌볜 지역에서는 항일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3·13시위를 포함해 5월까지 47차례에 걸쳐 8만6670명이 반일 독립시위에 참가했다.
특히 옌볜 지역의 항일 시위는 조선인뿐 아니라 일부 중국인도 참가한 한중(韓中) 공동 투쟁의 장이기도 했다.
○ 항일시위에서 무장투쟁으로
옌지(延吉) 현의 수많은 학교의 학생들이 언제나 항일시위의 선봉에 나섰다.
룽징 시 즈신(智新) 향의 명동학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학교 터는 옥수수 밭으로 변했고 ‘명동학교 옛터’라고 새겨진 비석만이 밭 한가운데서 홀로 역사를 지키고 있었다.
조선족 주민 송길남 씨(47)는 “이곳은 집집마다 태극무늬를 넣은 막새기와를 지붕에 얹을 정도로 독립열기가 드높았던 곳”이라고 말했다.
평화적 시위와 맨주먹만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현실로 인해 3·13운동은 자연스럽게 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1919년 3월부터 시작된 무장운동은 24개 지역 4650명 규모의 독립군 부대로 성장했다.
이 같은 무장은 빛나는 승리로 이어졌다.
10월 벌어진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는 6일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 토벌대 700여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뒀다. 독립군은 이처럼 1920년대 중국 동북지역에서 수백 회에 걸쳐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다.
○ 한중일 공동 번영의 길로 나가야
90년 전 일본에서의 2·8독립선언과 한반도에서의 3·1운동, 간도에서의 3·13운동은 모두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외친 의거였다.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한중일 3국은 과거 지배와 피지배, 침략과 저항으로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며 “3·1운동 90주년은 한중일 3국이 협력해 공동 번영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옌볜·룽징=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