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럴’이란 이름의 주홍글씨

  • 동아일보
  • 입력 2008년 10월 15일 02시 57분



오바마 “리버럴” 평가에 반박… 중도 강조

민주당 약진에도 거물 정치인들 표현 회피

“과거 반전운동-마약 등으로 이미지 나빠진 탓”


"리버럴의 대약진이 가능한 시기인데도 정작 워싱턴에서 '리버럴'이란 표현은 실종 상태다."

미국 하원의 한 간부가 13일 동아일보 취재진에게 대선 판세를 설명하면서 던진 말이다.

사실 요즘 미국은 '(상대적) 진보 이념'이 약진하기 좋은 토양이 겹겹이 쌓이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 대세론, 사상 초유의 금융위기와 경제난,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실정(失政), 진보적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

하지만 올초 경선부터 시작해 선거를 20일도 채 남기지 않은 현재까지 정작 '나는 리버럴'이라고 말하는 지도자급 정치인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사회 경제적 흐름은 반(反)자유방임경제, 반보수 쪽으로 기울고 있지만 '리버럴'이란 표식은 '주홍글씨'처럼 기피하는 아이러니가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도 기피하는 리버럴= 오바마 후보의 공식 선거홈페이지에선 '리버럴'이라는 단어를 찾기 어렵다. 그를 소개하는 코너는 "소수민족과 흑인 등 약자의 편에 서서 커뮤니티 조직가로 활동하고 전쟁에 반대했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리버럴이란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오바마 후보는 올해 초 내셔널저널이 그를 '2007년 가장 리버럴한 의원 1위'로 평가하자 대변인 명의로 반박했다. "대선 준비 때문에 99개의 표결 중 67개밖에 참가하지 못했고 그중 63개가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 같은 내용이었는데 힐러리 의원은 16위이고 오바마 후보는 1위라는 건 납득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힐러리 의원을 비롯해 다른 경선 후보들도 '리버럴'로 분류되는 걸 거부하긴 마찬가지였다. 힐러리 의원은 차라리 '프로그레시브'(progressive·진보 개혁주의자)란 표현은 받아들인다.

8월 25~28일 덴버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때도 연단에 등장한 숱한 정치지도자 가운데 스스로를 '리버럴'이라고 칭하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의회 관계자는 "현재 정치지도자 중 리버럴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정도"라며 "케네디 의원은 대권에 욕심이 없다"고 덧붙였다.

물론 선거철을 맞아 중도성향을 강조하는 건 진보, 보수 모두 마찬가지다.

하지만 올해 상반기 공화당 경선 후보들이 '원조 보수' 경쟁을 벌였고 존 매케인 대선 후보-세라 페일린 부통령 후보 유세장에선 "리버럴에 맞서 보수주의 가치를 지키자"는 외침이 수없이 나오는 것에 대비해 보면 민주당 진영의 '리버럴 실종'은 대조적이다.

정치권의 이런 현상은 미국 대학, 언론, 문화계가 '리버럴의 아성'이라 불리는 것에 비춰 봐도 주목된다. 미국의 주요 제도권은 1960, 70년대 반제도권 투쟁을 거치며 성장한 베이비붐 세대가 수십 년간 주도권을 잡아왔다.

이번 대선에서도 할리우드는 반부시 성향의 작품을 쏟아내고 있고 주류 언론의 의제 설정도 민주당 편향이라는 지적이 있다. 지난달 초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 △동부의 엘리트 △뉴욕타임스 등 주류언론 △노조 시민단체 등 '리버럴 기관'에 대한 성토가 쏟아졌다.

▽'극단주의적 부정적 문화의 원죄'=미국 랜드연구소의 함재봉 수석정치학자는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하고 재정적자가 커지면서 리버럴들은 거대정부를 방만하게 운용했다는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며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등장하고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워싱턴에서 리버럴리즘은 일종의 '회피 단어(guilty word)'로 전락했다"고 분석했다.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의 김동석 소장은 "시민사회에선 '리버럴'을 훈장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남아 있고 (유권자의 지지를 잃을) '리스크'가 없는 대학 언론 문화계는 여전히 리버럴이 강한데도 정치권은 리버럴이란 표현을 한사코 기피하는 현상은 과거 극단적 리버럴들이 남긴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조지워싱턴대 박윤식 교수는 "1960년대, 70년대 초 리버럴 정치인들의 주장이 과격해진데다 반전 운동이 마약, 성적(性的)혁명, 가족해체 등 극단적 반문화주의와 뒤섞이면서 리버럴은 미국적 전통 가치를 중시하는 메인스트림에서 기피하는 이미지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으론 부시 행정부의 실패와 경제난의 영향으로 '라이트 네이션(우파국가)'의 전성시대가 끝나면 정치인들도 차츰 리버럴이란 표지를 더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리처드 크리스텐슨 전 주한 미국 부대사는 "이라크전쟁의 폐해 등 어젠다 면에서는 리버럴 측이 앞설 수밖에 없는 여건"이라며 "동부의 리버럴들이 엘리트주의를 떨쳐내고 전통적, 종교적 가치관을 중시하는 국민의 거부감을 얼마나 덜어낼 수 있느냐에 그들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말했다.

::리버럴::

19세기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봉건적 공동체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상 및 운동을 뜻하는 리버럴리즘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 하지만 현대 미국에서는 우파, 보수주의자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통용된다. 자유주의자, 진보주의자 등으로 번역된다. 미국 내 리버럴은 1930년대 뉴딜정책을 거치면서 주류로 떠올라 1960년대 린든 존슨 대통령 때 정점에 달했다. 국민 복지를 위한 연방정부의 적극 개입을 지지하며 흑인, 여성, 소수민족 등과의 연대를 강조한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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