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부호들 ‘脫정치 바람’

  • 입력 2008년 7월 31일 02시 55분


옐친-푸틴시절 ‘권력 뜨거운 맛’ 본후 거리감

메드베데프 취임후 국익 앞세워 사업에 전념

‘권력 핵심과는 가급적 멀리멀리….’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취임한 뒤 모스크바 억만장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보리스 옐친과 블라디미르 푸틴 전 대통령 시절에 권력의 ‘뜨거운 맛’을 봤던 러시아 부호들이 요즘 부쩍 ‘탈(脫)정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첼시 구단주인 로만 아브라모비치(41) 씨는 이달 초 추콧카 주지사를 사퇴한 후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고 리아노보스티통신이 전했다.

옐친 대통령 시절 ‘크렘린의 돈줄’로 통했던 그는 푸틴 대통령 당시 두 차례나 주지사직 사의를 표명했지만 모두 반려됐다. 그는 지난해 러시아 부호 1위에서 올해 초 3위로 밀렸다.

메드베데프 대통령 당선 이후 러시아 부호 1위로 오른 올레크 데리파스카(40) 루스알 대주주도 크렘린과 거리를 두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푸틴 대통령 재직 당시 동계올림픽 유치를 발 벗고 지원했던 그였지만 최근 고위직이 참석하는 각종 모임에도 일절 참석하지 않고 있다.

옐친 대통령 때부터 러시아 10대 부호 명단에 들었던 블라디미르 포타닌(47) 씨도 더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듯하다. 한때 ‘크렘린의 현찰’이라고도 불렸던 그가 소유한 종합보험회사 인고스트라흐는 요즘 세무조사를 받고 있다.

러시아 부호들은 정치 대신 ‘애국’을 앞세운 사세 확장과 이미지 구축에 전념하고 있다.

미하일 프리드만(44) 알파그룹 회장은 영국 석유기업의 러시아 자회사인 TNK-BP의 지배권 장악에 몰두하고 있다. 영국 기업의 러시아 시장 지배를 막으면 애국자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데리파스카 씨는 요즘 중국과 나이지리아를 자주 방문한다. 러시아 기업의 해외 확장을 통해 국익을 높인다는 인상을 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아브라모비치 씨는 러시아 축구대표팀 경기가 열릴 때마다 운동장을 찾아가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러시아 대표팀 응원에는 포타닌 씨도 뒤지지 않는다. 관중석에서 ‘필승, 러시아’를 외치는 그의 모습이 언론에 자주 비친다. 그는 알루미늄 니켈 산업 대형화를 통해 러시아 군수산업도 지원하겠다는 의사도 비쳤다.

정치평론가 비탈리 막시모프 씨는 “러시아 부호의 탈정치 현상은 크렘린 정치에 관여했다가 혼쭐이 났던 과거 경험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막을 올렸을 때 크렘린과의 정경유착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일부 부호는 권좌를 노리다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옐친 대통령 시절 크렘린 인사권을 쥐고 흔들었던 자동차 재벌 보리스 베레좁스키 씨는 푸틴 대통령이 등극한 뒤 영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미디어 재벌 블라디미르 구신스키 씨도 최근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났다. 에너지기업 유코스를 소유하고 2004년 러시아 부호 1위로 수직 상승했던 미하일 호도르콥스키 씨는 지금도 시베리아 교도소에 갇혀 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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