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 실종’ 수렁속의 CIS국가

  • 입력 2008년 6월 19일 02시 57분


길거리 시위로 날 새고… 장기독재-탈법 판치고…

■ 옛 소련서 독립한 독립국가연합 국가들의 현주소

“법 대신 길거리 시위와 장기 독재가 지배하는 잡종(Hybrid) 민주주의.”

최근 우크라이나와 아르메니아, 키르기스스탄을 다녀온 러시아 정치전문가 이반 사프란추크 씨는 1991년 옛 소련에서 분리 독립한 독립국가연합(CIS) 국가들의 정치체제를 이같이 요약했다.

CIS에서 법치주의가 실종되고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에서 이탈하면서 민주국가도, 독재국가도 아닌 잡종 체제가 유행하고 있다고 미국과 유럽 전문가들도 분석하고 있다.

▽국민들은 시위, 정부는 탈법=오렌지혁명(우크라이나), 장미혁명(그루지야), 레몬혁명(키르기스스탄) 등 각종 민주화 운동을 겪은 나라들에서 최근에는 소요 사태가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17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찬성하는 시위 군중과 반대하는 시위 군중이 저마다 거리로 뛰쳐나와 혼란이 빚어졌다.

러시아 언론들은 “각 정파가 일당을 주고 동원한 전문 시위대가 하루 종일 정부청사와 의회 앞의 교통을 마비시켰다”고 전했다.

이날 시위는 오렌지 혁명의 한 축이었던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과 야당인 지역당의 길거리 대결이었다.

유셴코 대통령은 NATO 가입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율리야 티모셴코 총리의 의견을 무시하고 서방 측에 가입 의사를 밝혔다. 지역당 당수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총리는 NATO 가입에 반대해 왔다.

시민운동가인 블라디슬라브 카스키프 씨는 “대통령이 법안 발의와 의회의 비준 등 법 절차를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바람에 나라가 병들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같은 법치주의 실종 현상이 목격됐다. 지난해 4월 유셴코 대통령은 다수당이었던 지역당의 ‘의원 빼가기’에 맞서 의회 해산을 명령했다. 그러나 야누코비치 전 총리는 의회 해산이 위헌이라며 이에 불복했고 헌법재판소는 위헌 결정을 유보했다.

당시 이 나라 법 집행 기관인 검찰총장과 내무장관도 대통령의 명령을 듣지 않아 법질서 혼란은 극에 달했다.

중앙아시아의 빈국인 아르메니아와 키르기스스탄도 법치주의 실종으로 사회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세르즈 사르키샨 아르메니아 대통령은 올 2월 대선 이후 선거부정에 항의하는 시위가 격화되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러나 재선거를 요구하는 집회가 지금도 열리고 있다.

러시아 일간 네자비시마야가제타는 “거리의 집회와 경찰, 여당의 부패가 근절되지 않는 한 아르메니아의 민주주의는 요원하다”고 보도했다.

키르기스스탄도 2003년 이후 두 차례 헌법을 개정했으나 지금도 부정선거 시비와 장외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법치가 성장의 선결 요건”=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등 고속 경제 성장과 사회 안정을 되찾은 나라들도 법치주의 실현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난달 취임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부패 척결과 법치주의 실현을 최고 국정 과제로 삼았다. 러시아 검찰은 “관료들이 받는 뇌물이 국가 예산의 3분의 1 수준에 도달했다”고 발표했다. 법 집행의 첨병 역할을 하는 관료들의 부패가 없어지지 않으면 법질서 회복이나 제2의 도약이 어렵다는 것이 메드베데프 측근들의 분석이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18년간 통치해 온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의 맹주로 자리 잡았지만 뒤늦게 법치주의 조기 정착과 다당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한 외국인은 “최근 서방 자본이 일제히 빠져나가는 것을 본 카자흐스탄 수뇌부가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 깨달은 모양”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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