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기홍]한인들이 오바마를 꺼리는 까닭은?

  • 입력 2008년 2월 28일 02시 55분


친구든, 동료든, 친척이든 내가 얼마나 그 사람을 아끼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가 있다.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시샘이 생기는지 보는 거다.

아파트 값이 엄청 올랐다는 소식, 아이가 일류 대학에 들어갔다는 소식….

전화 너머 들려오는 경사에 "잘됐다"를 연발하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순간 마음 한 구석에선 시샘하는 마음이 찔끔 배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부모 자식 등 '내 피붙이'에게 생긴 기쁜 일은 오로지 기쁨만으로 다가오는데, 그 울타리만 벗어나면 시샘에서 자유롭기 힘든 이유는 왜일까.

흥미로운 점은 그 사람과 내가 연배나 사회적 위치가 얼마나 비슷한지, 그 일이 나에게도 생길 수 있는 개연성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시샘의 농도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특히 나보다 나을 게 없는 것 같은 사람에게 복덩이가 굴러들어갈 때 시샘은 진해진다.

객지에 있는 탓일까. '한평생 우리가 맺는 관계 가운데 시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100%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 주고 슬퍼해 주는 그런 관계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 그래서 그런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이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이 사무친다.

사실 느닷없이 시샘 얘기를 꺼낸 이유는 미국 대선을 취재하면서 받은 씁쓸한 느낌 때문이다.

"어휴, 흑인은 아직 멀었어요. 우리가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봐서 아는데…."

'오바마 열풍'이 불지만 한인 이민 1세대 사이에선 조금 다른 목소리도 들린다.

슈퍼화요일에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 센터가 한인 상대 출구조사를 했는데 83% 대 17%로 힐러리의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한인들의 설명은 이렇다.

"힐러리가 한인 커뮤니티와 훨씬 더 친숙하고 소수민족에게 공을 많이 들였다. 그리고 경륜의 힐러리에 비해 오바마는 검증된 게 없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그런 이유가 전부가 아닌 경우도 적지 않다. 사석에선 "블랙은 아직 안 돼"라는 어이없는 말을 듣게 되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이민 1세대인 A 교수의 고백이다.

"오바마 현상을 보면서 나도 놀라고 있다. 내가 미국을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백인 중 젊은 층, 고학력 고소득층에 오바마 지지자가 많다. 인종에 상대적으로 덜 구애받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같은 소수민족인데도 왠지 오바마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 경험 미숙 등의 이유를 대지만 마음 한구석엔 '우리가 흑인보다 훨씬 우월한데…' 하는 편견이 도사린 게 아닌가 싶다."

흑인 대통령이 왠지 마음이 편치 않은 건 다른 소수민족도 마찬가지다. 특히 히스패닉은 힐러리 지지세가 강하다. 차이라면 히스패닉은 흑인을 경쟁상대로 여기는 데 비해 한인들은 우월감이 강하다.

물론 개개인의 후보 선호도를 반드시 인종적 요소와 결부시킬 수는 없다. 힐러리나 오바마 모두 많은 장점을 가진 유력 후보며, 지지하지 않는 사람에겐 그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인종 이외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선입견에서 자유로운 한인들도 갈수록 많아진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세계는 미국을 다르게 볼 것이며, 인종 계층간 통합의 시대가 열린다"는 신념으로 오바마를 위해 뛰는 한인들도 적지 않다. 특히 1.5세대, 2세대로 가면 '흑인은 아직'이란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제3자의 관점에서 '같은 소수계가 대통령이 되면 주류와 소수계의 장벽이 훨씬 낮아질테니 한인들도 당연히 오바마 열풍을 환영하지 않을까'라고 예상했던 것과 현실은 달랐다.

A 교수는 "열린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는데 쉽지 않다"며 "어쩌면 내가 백인들보다 더 피부색에 연연하는 게 아닌지 자성해본다"고 토로했다.

나 역시 노력해본다. 비교하려는 마음을 버리면 시샘은 사라지지 않을까. 남의 기쁨과 슬픔을 더 온전히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친구가 주식으로 떼돈을 벌었다고 내 재산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역시, '쉽지가 않다'.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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