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보수주의’ 美대선 뒤흔든다

  • 입력 2007년 12월 22일 02시 55분


코멘트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하려는 시도에 맞서 가족의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州) 헌법 개정 뿐입니다. 주 의사당 앞으로 모여 우리의 힘을 보여줍시다."(마이클 하트윅 목사)

다음달 3일 미국 대통령 선거전의 개막 테이프를 끊는 코커스(당원대회)가 열리는 아이오와 주에선 요즘 '아이오와 결혼 수정안'(IMA) 통과를 위한 시민운동이 열기를 뿜고 있다.

'아이오와 가족정책 센터' 등 전통적 가족의 가치를 옹호하는 단체들은 다음달 16일 의사당 앞에서 헌법개정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 계획이다.

논란은 결혼을 이성간 결합으로 규정한 '아이오와 결혼 보호 법'에 대해 2005년 동성애 커플 6쌍이 헌법 위반이라며 소송을 제기한데서 비롯됐다. 이 법은 2003년 미국을 떠들썩하게 한 동성애 결혼 합법화 논란의 영향으로 보수파의 영향력 아래 제정됐다.

그런데 주 지방법원은 올 8월 동성애 커플들의 편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전통적 가족 가치 옹호 단체들이 "엉터리 판결에 맞서 결혼 제도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 헌법 개정"이라며 들고 나선 것.

논란은 코커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역의 가족 운동 단체들은 물론이고 '가족에의 포커스' 등 전국 규모 단체들도 가세했다. 이들은 동성애 결혼, 낙태 등 도덕·윤리적 쟁점에 대한 주요 대선 후보의 발언과 투표 기록을 정리한 자료를 배포하며 유권자들이 가족의 가치를 지켜줄 후보에게 표를 몰아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2004년 대선을 끝으로 미국 정치의 무대에서 물러나 다시 '안락한 가정'(sweet home)속으로 침잠한 것처럼 여겨졌던 '사회적 보수주의자'(Social conservative)들이 다시 결집하고 있는 현장중 하나다.

▽재결집하는 사회적 보수주의= 미국에선 올 가을까지만 해도 "사회적 보수주의는 이제 역사뒤로 사라졌다"는 논평과 보도들이 많이 나왔다.

그런 주장의 주요 논거는 공화당 대선 후보 레이스였다. 낙태합법화와 동성애 결혼 인정을 주장하는 가장 비(非) 공화당원적인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이 안정적으로 선두 자리를 지키며 대세론을 형성했던 것이다.

평론가들은 "동성애 결혼 합법화를 놓고 논란이 분분했던 지난번 대선에서 이라크 전쟁 실패에도 불구하고 조지 W 부시 후보에게 표를 몰아줬던 보수주의자들이 '이젠 누가 전통적 가치의 옹호자인지 보다는 누가 힐러리에 맞서 이길 후보인지에 최우선을 둬야 한다'는 쪽으로 옮겨갔다"고 분석했었다. 실제로 사회적 보수주의자 가운데 상당수가 줄리아니를 지지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많았다.

게다가 바닥을 기는 부시 대통령의 인기는 더 이상 '보수적 가치'를 말하기 어려운 풍토를 만들었다.

그러나 올 가을부터 변화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가족에의 포커스'의 창립자인 제임스 돕슨 박사와 '가정연구 위원회'의 토니 퍼킨즈 등 보수파 지도자들은 9월말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비밀 회합을 갖고 "공화당이 낙태를 지지하는 인사를 대선후보로 지명할 경우, 우리는 제3당 후보를 옹립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2003년 여름 미국가족연합의 창시자인 도널드 윌덤 목사 주도로 복음주의자들이 워싱턴 인근에 모여 '동성결혼 금지 개헌운동' 방안을 논의하면서 2004년 대선에서 도덕·가치 이슈를 대선 쟁점으로 만들자는데 뜻을 모았던 것과 흡사한 형국이다.

이어 전형적인 사회적 보수주의자로 간주되는 마이크 허커비 전 아칸소 주지사가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10월에 지지율 4%에 불과했던 그는 지지율이 급상승해 현재 일부 여론조사에선 줄리아니 후보를 약간 앞서거나 간발의 차이로 뒤지고 있다. 특히 그는 아이오와와 플로리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등에서 선두로 올라섰다.

▽뿌리와 위력= 내년 초 '사회적 보수주의'란 제목의 책을 출간할 예정인 정치 컨설턴트 제프리 빌 씨는 최근 네오콘(신보수주의) 기관지인 위클리스탠더드 기고문에서 "최근의 흐름은 사회적 보수주의가 미국 정치의 거대한 주류 흐름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진단했다.

그는 사회적 보수주의를 실체가 단단한 정치 이념이 아닌 일시적 현상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첫째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다는 것이다. 즉 수십 년 전에도 전통적 도덕과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주의는 강했지만 당시엔 낙태합법화, 동성애 결혼 같은 쟁점 자체가 없었다. 그러다 1968년 파리 68혁명을 기점으로 좌파들이 가족을 비롯한 전통적 사회적 기구들을 정면 공격하면서 도덕과 가치가 정치적 쟁점의 영역이 됐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보수주의는 미국에서만 독특하게 위세를 발휘하는 이념이란 것이다. 유럽의 보수 정당들이 좌파를 공격하는 근거는 경제, 외교정책에 대한 것이다. 도덕적 가치를 옹호하는 주장은 사회주의, 자유주의적 기류 앞에 맥을 못 춘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사회적 보수주의가 대선의 향방을 가를 만큼 위력을 발휘하는 정치적 이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우선 지폐에 '신을 믿는다'고 명시하고 독립선언서에서도 '모든 인간은 창조주로부터 생명과 자유 행복의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문장이 나올 만큼 기독교의 영향력이 큰 사회적 분위기를 들수 있다.

공산주의 몰락후 사멸하는 듯한 좌파가 계획경제, 사회주의 경제로는 말발이 먹히지 않자 전통적 가치관과 사회통제 기제에 대한 공격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시도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즉 이념전쟁의 전선(戰線)이 경제·정치에서 가치관으로 이동한게 우파들이 사회적 보수주의의 깃발아래 결집할 수 있는 동력이 됐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1980년 이래 역대 대선에서 도덕·가치 이슈의 영향력은 컸다.

1980년 대선에서 낙태 문제가 이슈가 되면서 레이건은 리버럴 지역이지만 카톨릭 교도가 많은 지역인 매사추세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1988년 선거 때 조지 H 부시(현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 후보는 민주당 마이클 두카키스 후보가 학교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도록 강제화하는데 반대한 것을 끈질기게 공격했다. 또 듀카키스 후보가 지지한 '재소자 휴가' 제도로 인해 한 교도소에서 나온 중범죄자가 강간과 유괴를 저지른 사건을 집요하게 거론해 큰 효과를 봤다.

사회적 이슈를 둘러싼 선거 논쟁은 1990년대 대선에선 거의 사라졌으나 2000년대에 다시 등장했다.

2004년 대선 때는 전체 유권자의 20%가 후보 선택 기준이 도덕 이슈였다고 대답해 경제와 이라크 전쟁을 앞섰다. 당시 그렇게 대답한 유권자 가운데 80%가 부시 후보를 택해 대선 승리의 견인차 노릇을 했다.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

김승련특파원 srkim@donga.com

::사회적 보수주의(Social Conservatism)::

가족을 비롯한 전통적 사회기구와 가치의 존중 및 부활을 주장하는 정치 사회적 흐름. 작은 정부, 시장경제 등 정치·경제 체제에 중점을 두는 일반적 보수주의와 다소 다른 개념으로 사용된다. 현재는 낙태 합법화, 이혼, 동성애, 줄기세포 연구 등에 대한 반대로 표출된다. 기독교 복음주의 세력과 겹치는 부분이 많지만 복음주의자라고 해서 다 사회적 보수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북유럽에선 다소 다른 개념으로 쓰여 '복지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를 의미한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