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기업들 엔高 이렇게 극복했다는데

  • 입력 2007년 11월 3일 03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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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달러화 하락에 따라 한국 원화 가치가 치솟고 있다. 달러 가치 하락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돼 한국은 ‘원고 시대’에 대한 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 기업들도 1985년 238.0엔이던 달러당 연평균 환율이 1995년 94.1엔까지 떨어지는 극심한 엔고(高) 현상을 겪었다. 이로 인한 수출경쟁력 저하에 1990년대 전반 부동산 거품 붕괴에 따른 불황까지 겹치면서 대부분의 일본 기업의 매출과 이익은 곤두박질쳤다. 늘어나는 적자와 빚을 감당하지 못해 쓰러지는 기업도 줄을 이었다. 하지만 최근 4, 5년간 일본의 대형 수출업체들은 매년 사상 최고 경영실적을 경신하고 있다. 이는 일본 기업들이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어떤 엔고 압력에도 버텨낼 수 있는 경쟁력을 갖췄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일본 기업들은 어떤 노력을 통해 엔고를 극복했는지 살펴본다.》

‘○ 해외 네트워크 강화

가장 많은 기업이 선택한 수단은 인건비 등 생산원가가 적게 드는 중국 등 아시아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는 방법이었다.

일본 제조업체 전체적으로 보면 1985년 10조 엔대이던 해외 현지법인의 매출액이 1997년에는 60조 엔을 넘어섰을 정도다.

전자업계에서는 아이와(2002년 소니에 흡수 합병됨)가 가장 선구적이면서도 성공한 업체로 꼽힌다.

이미 1990년에 해외생산 비율이 54%에 이르렀던 아이와는 이후로도 해외 진출을 가속화해 1998년에는 그 비율을 90%까지 높였다. 아이와는 상품 설계 등 핵심적인 권한까지 해외로 대폭 이전했다.

이 같은 전략은 대부분의 전자업체가 엔고로 신음하던 1990년대 중반에도 아이와가 홀로 승승장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아이와 모델은 1998년경 말레이시아 등이 환율 경쟁력을 상실하면서 벽에 부닥쳤다. 일본 기업들의 핵심기술이 해외로 유출되고 국내 산업이 공동(空洞)화된다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이 때문에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자동차업체들과 전자업체들은 최근 들어 일본으로 ‘U턴’하는 추세다.

○ 환 위험 최소화

후지쓰와 히타치 등 일부 기업은 수출액과 수입액을 동일하게 맞춰 환율의 변화에도 급격한 충격을 받지 않는 전략을 쓰기도 했다.

수출대금을 엔화로 받는 등 무역결제에서 달러화 의존도를 줄이는 방법도 동원했다.

공작기계용 컴퓨터수치제어(CNC)장치 제조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화나크라는 기업은 현재 수출계약을 100% 엔화로 하고 있다.

외환시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회사의 경영에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회사 측의 설명이다.

다만 화나크식 전략은 거래 상대방에게 ‘큰소리’칠 수 있는 나만의 기술, 나만의 상품을 가진 기업이 아니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게 한계.

○ 수출에서 내수(內需) 주도로 전환

엔고의 ‘광풍’이 약간 수그러든 1996년에도 일본의 지방 경제는 실업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수출용 금속양식기를 제조하는 중소기업이 밀집한 지역으로 유명하던 니가타(新潟) 현 쓰바메(燕) 시의 사정은 달랐다.

기업의 구인 수요가 구직자 수를 1.4배가량 웃돌 정도로 제조업체들은 호경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 비결은 수출에서 내수로의 방향 전환이다.

A사의 예를 보면 1986년경까지 5억 엔에 이르는 매출의 100%가 수출용 양식기였다.

하지만 엔고 현상이 진행되자 이 회사는 수출용 식기의 비중을 절반 정도로 줄였다. 그 대신 스테인리스 가공기술을 이용해 내수용 야외용품 시장을 개척했다.

주변의 다른 중소기업들도 A사와 같은 방식으로 기업 실적을 크게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전한다.

대기업 중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NEC의 이동전화생산 공장인 사이타마일본전기는 1994년까지 생산량의 3분의 2인 130만 대를 수출했지만 1995년 말에는 수출을 전혀 하지 않는 내수형으로 전환했다.

○ 생산방식 혁신

현재 소니를 제치고 일본의 대표적인 전자업체로 떠오른 캐논은 ‘셀(Cel·세포라는 뜻) 생산방식’을 도입해 생산성을 크게 끌어올렸다.

셀 생산방식이란 컨베이어벨트를 사용하지 않고 1명 또는 소수의 작업자가 독립된 공간에서 복수의 공정을 일관해서 작업하는 방식. 이른바 고부가가치 제품의 ‘다품종 소량생산’에 적합한 방식이다.

캐논은 1995년부터 4년간 세계 54개 공장에서 컨베이어벨트를 걷어내고 셀 방식을 도입했다.

생산방식을 바꾸자 작업공간과 임대 창고 등 약 46만 m²를 절약하고 인원을 9900명가량 감축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 끝없는 원가 절감

급격한 엔고는 일본의 간판 제조업체인 도요타자동차에도 큰 충격이었다.

도요타자동차는 낭비 요인을 최대한 없애는 생산방식으로 유명하지만 엔고 위기를 맞아 다시 한번 ‘마른 수건 쥐어짜기’식 경비 절감에 나섰다.

1994년 봄 원가 절감의 집대성이라는 ‘RAV 4’를 공개한 데 이어 1995년 가을에는 원가경쟁력을 더 강화한 신형 ‘카로라’ 등을 내놨다. 이를 위해 도요타자동차의 부품 회사들은 1992년경부터 3년 동안에만 15∼20%의 원가를 절감했다.

도요타자동차의 원가절감 노력은 엔화가 강세로 돌아선 다음에도 중단되지 않았다.

이시카와증권투자연구소에 따르면 2000년 4월부터 2006년 3월까지 6년 동안 도요타자동차가 절감한 원가는 1조2700억 엔에 이른다.

도요타자동차의 6년간 영업이익 증가분 중 115%가 원가절감 효과에서 나왔다.

달러당 엔화 환율이 115엔대에서 105엔대로 떨어질 경우(엔화 가치는 상승)의 도요타자동차의 영업이익 감소 효과는 4% 정도라고 이 연구소는 분석했다. 웬만한 엔고는 ‘찻잔 속의 태풍’인 셈이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 당시 日정부 엔高 대응 문제점

상처 곪은 상태서 뒷북 대책

장기불황 터널로 밀어 넣어

1985년 9월 달러화 가치 급락을 막기 위한 주요 선진국 간 ‘플라자 합의’로 급속한 엔고현상이 진행되자 일본 정부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

일본 경제정책 당국이 1980년대 후반 극심한 ‘엔고 불황’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선택한 수단은 급속한 저금리 및 금융 완화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주식과 부동산 거품을 조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 정부의 잘못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90년경에는 지나친 긴축금융정책을 펴 일본 경제를 극심한 장기 불황의 터널 속으로 몰아넣었다.

1993년부터 본격화된 엔고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가 사전에 충분한 대응을 했더라면 충격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예컨대 엔고 현상의 근본 원인인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1992년 1300억 달러에 육박했고, 그 이듬해에는 더 큰 폭으로 늘어날 기세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미국 정부가 나서서 엔고를 수정하려 할 것으로 착각해 건전한 내수(內需) 육성을 통한 흑자 규모 축소 등의 노력을 게을리 했다.

그 결과 1992년 달러당 126.6엔이던 엔화 환율은 1993년 111.1엔, 1994년 102.2엔, 1995년 94.1엔까지 급락(엔화가치 급등)했다. 야당에서는 ‘내각 총사퇴론’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다급해진 일본 정부는 1995년 4월부터 굵직한 대책을 쉼 없이 쏟아냈다.

4월에는 △예산 투입을 통한 내수 진흥 △규제 완화를 통한 수입 촉진 △공공요금 인하 △효과적 신규 사업 육성을 위한 경제구조 개혁 등을 골자로 한 긴급 엔고 대책을 발표했고 2개월 뒤에는 다시 보완 대책을 내놨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쏟아낸 대책들에 대해 시장의 반응은 대체로 싸늘했다. 이미 엔고로 인한 ‘상처’가 곪은 상태에서 나온 ‘뒷북성 대책’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일본 기업들이 혹독한 엔고 환경에서 살아남은 것은 스스로의 노력 때문이었지 정부의 지원이나 보호 덕분이 아니었던 셈이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 엔高가 남긴 것

1995년 1달러=79엔 ‘超엔고’ 역대 최악

종신고용 신화 붕괴… ‘잃어버린 10년’ 고통

일본 도쿄(東京) 환시장의 엔화 환율이 111엔대를 기록한 1993년 3월. 통산성이 대기업 83개사를 대상으로 엔고가 끼치는 영향에 대한 긴급 조사를 했다.

엔고가 1분기 실적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응답 기업의 44%, 엔고가 1년간 계속될 경우 영향에 대해서는 61%가 “수익이 악화된다”고 답했다. 엔고가 장기화하면 기업 경영에 치명적이라는 뜻이었다.

달러 대비 엔화의 가치가 급등한 ‘엔고 현상’은 지금까지 크게 네 차례 나타났다.

첫 번째는 1971년의 ‘닉슨 쇼크’.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금과 달러의 교환을 정지하는 조치를 발표하자 국제 경제 질서가 혼란에 빠졌다. 엔-달러 환율은 ‘1달러=360엔’의 고정 환율에서 1973년 변동 환율제로 바뀐 뒤 급격한 엔화 절상이 진행됐다.

1978년에는 미국의 경상수지가 적자로 전환하면서 제2차 엔고가 나타났다.

세 번째 엔고는 1985년 서방선진 5개국 재무장관들이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선언한 ‘플라자 합의’의 결과였다. 이들은 ‘미국의 재정 및 경상수지 적자 해소, 일본과 독일의 내수 확대’를 목표로 환율에 개입하기로 선언했다. 그후 달러당 237엔이던 엔화는 1988년 2월 120엔으로 2배 가까이 절상됐다.

1990∼1995년에는 대미 무역흑자 증가와 내수 부진에 따라 엔고가 나타났다. 엔화 환율은 단기간에 200엔대에서 100엔 아래로 떨어졌다. 특히 1995년에는 79엔까지 엔화 가치가 치솟는 ‘초(超)엔고’를 기록했다.

이 당시의 엔고는 일본에 역대 최악의 영향을 미쳤다. 버블 붕괴 이후 디플레이션과 함께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로써 일본의 극심한 경기침체를 말하는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됐다.

1993년에는 종신고용이 보장됐던 일본에서 NTT마저 무려 1만 명의 희망퇴직을 받은 것이 당시 ‘구조조정’ 바람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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