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의 뜨거운 독립魂에 가슴 뭉클”

  • 입력 2007년 8월 15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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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중국 우한의 옛 중앙군사정치학교 분교를 둘러본 대학생 탐방단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1927년부터 1년 동안 이곳에서 한인 청년 200여 명이 군사교육을 받았다. 지금은 소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사진 제공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9일 중국 우한의 옛 중앙군사정치학교 분교를 둘러본 대학생 탐방단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1927년부터 1년 동안 이곳에서 한인 청년 200여 명이 군사교육을 받았다. 지금은 소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사진 제공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의 추격을 피해 확인된 것만 12차례나 중국 대륙 곳곳을 옮겨 다녔고, ‘간판을 들고 다니기조차 힘겨웠던’ 때도 있었습니다.”

7일 중국 제2의 도시 상하이(上海) 루완(盧灣) 구의 임정청사 옛터. 임정 국무위원이었던 운암 김성숙(1898∼1969) 선생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중국의 항일운동 사적지를 돌아보기 위해 9일의 대장정에 나선 50명의 대학생들은 지도교수인 충북대 박걸순(사학)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40도 안팎의 무더위 속에 상하이∼난징(南京)∼우한(武漢)∼광저우(廣州)∼구이린(桂林)∼충칭(重慶)∼베이징(北京)을 돌아보는 고단한 여정.

하지만 쓰러져 가는 폐가와 공원 한쪽의 작은 비석 하나에도 항일 운동가들의 뜨거운 독립 혼과 이에 얽힌 숱한 사연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배우면서 학생들의 표정은 새삼 진지해졌다.

○ 다시 새겨보는 임정의 의미

1926∼32년 임정이 머물렀던 상하이 청사는 1993년 중국 정부에 의해 복원돼 전시관으로 공개되고 있었다.

부엌이 있는 1층을 지나 좁은 계단으로 2층에 올라가자 임정 지도자 김구 선생의 집무실 겸 침실이 나왔다. 가족이 사용한 침대 하나와 책상, 4명이 앉을 수 있는 탁자가 전부였다.

최근 북한을 방문한 박 교수는 “북한은 독립운동사에서 임정에 대해 겨우 몇 줄 서술할 정도로 임정을 무시하고 있고, 대한민국도 임정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하지만 국내 사학계에 임정을 폄훼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임정은 1919년 3·1운동 후 한성정부 등 3개 정부가 합쳐져 독립에 대한 민족의 염원을 모아 수립됐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중국 대륙 전역을 떠돌면서도 일제에 맞서 명맥을 이어간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 안쓰러운 독립운동 성지들

상하이 임정청사처럼 보존이 잘된 독립운동 사적지는 많지 않았다. 특히 최근 급속한 경제성장 속에 중국 곳곳의 개발 열풍으로 한국 독립운동 사적지들의 원형이 훼손되고 있었다.

1938년 조선의용대가 창설된 우한의 한구(漢口)기독청년회관은 명품을 파는 가게로 변했다. 김성숙 선생이 주도했던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거점이었던 건물은 지금은 대중 사우나 간판을 달고 있다. 예전에는 미용실이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역사적 의미에 대한 현판 하나 없었고, 탐방단이 혹시 예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안타깝게 주위를 둘러보자 지나가던 중국인들이 신기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훈련장 자리였던 톈닝(天寧)사로 가는 길은 더욱 험난했다. 인근의 탄광 개발로 도로가 막혀 결국 현장까지 가는 것도 포기해야 했다.

○ 사적 보존 위해 중국과의 협력 절실

반면 중국은 일부 사적을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다.

상하이 임정청사는 15위안(약 18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지만 한국인 관광객을 태운 버스가 인근 도로를 막을 정도로 붐빈다.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결행했던 훙커우(虹口) 공원(현 루쉰 공원)의 기념관에는 안내원이 한국어로 설명하고, 기념품 가게까지 있다.

탐방단을 이끈 기념사업회 남기형 고문은 “정부가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 사적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고 사적의 복원이나 보존을 위해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상하이·광저우=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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