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유착 끊은 큰별” 히라이와 前일본 경단련 회장 타계

  • 입력 2007년 5월 24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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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부터 1994년까지 3년 반 동안 일본 경단련(經團連) 회장을 지낸 히라이와 가이시(平巖外四·사진) 씨가 22일 타계했다. 향년 92세.

일본 언론은 ‘마지막 재계인 가다’ ‘거성 떨어지다’라는 제목과 함께 1면과 경제면에 해설 기사를 실어 그를 추도했다.

그가 경단련 회장을 맡은 시기는 일본에서 버블 경제가 붕괴하고 자민당 일당 지배의 ‘55년 체제’가 무너진 정치경제적 격변기였다.

본래 정관계의 막후에서 재계가 요구하는 정책을 관철하는 수완으로 유명한 그였지만 1993년 9월 종합건설사 오직사건을 계기로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이 들끓자 경단련이 정치헌금을 알선해 온 관행을 과감히 폐지했다.

그가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정권의 사적(私的) 자문기관의 좌장을 맡아 같은 해 12월에 내놓은 ‘히라이와 리포트’는 뒷날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추진한 구조개혁 노선의 원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대담한 규제 완화를 중심으로 새로운 경제시스템의 구축을 제창한 이 리포트는 “단기적으로는 규제 개혁이 일부에게 고통을 주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자기 책임 원칙과 시장원리에 입각한 자유 경제사회의 건설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이보다 앞서 버블 붕괴 직후인 1991년에는 회원 기업의 행동지침을 정한 ‘기업행동헌장’을 내놓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격동의 시절에 청년기를 맞았던 그는 1939년 도쿄데이코쿠(東京帝國)대를 졸업하고 도쿄전등(현 도쿄전력)에 입사했다가 이듬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격전지인 뉴기니 전선에서 살아남은 행운아. 당시 부대원 117명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겨우 7명이었다.

이 같은 참혹한 체험 때문에 그는 “비참하게 죽어간 그 많은 젊은이가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생전에 야스쿠니신사에는 절대 가지 않았다.

만년에 고이즈미 전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개헌 추진 등 일본 사회의 우경화에 그는 “어쩌자는 것이냐”라며 개탄했다. 경단련이 우경화 동조 움직임을 보일 때 “경제에 애국심 같은 강권(强權)의 윤리는 포함돼 있지 않다”라고 질타했다.

요미우리신문은 ‘마지막 재계인’이란 제목의 추모 기사에서 “‘재계인’이란 말에는 ‘경제인’이나 ‘경영자’와는 다른, 정치와 의사소통이 되고 정책에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뜻이 있다. 그의 타계로 일본에서 ‘재계인’이란 단어도 사라지게 됐다”고 추모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도 “전후 일본의 발전을 지탱한 보기 드문 문화적 재계인이었다”고 회고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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