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적자 연연않는 회장… 아무도 못말리는 실무팀

  • 입력 2007년 3월 23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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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자 내겠다는 임원에게 사장이 호통을 치는 회사, 창업 후 100년이 넘도록 비상장과 가족경영을 고집하는 기업.’

일본의 유명 주류·음료 회사 산토리의 ‘내 갈 길을 가련다’는 ‘마이웨이(My Way) 경영’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닛케이비즈니스는 최근호 표지기사에서 이를 크게 다뤘다.

지난해 11월 산토리 본사 임원회의실. 1963년 사업 참여 이후 만년 적자인 맥주 부문을 총괄하는 마루야마 히로시(丸山紘史) 상무는 “맥주가 정말 흑자를 내느냐?”며 눈물을 글썽이던 퇴직사원들의 얼굴을 잠시 떠올린 뒤 말문을 열었다.

“올해는 흑자를….”

하지만 마루야마 상무의 말은 몇 마디 이어지지 못했다. 사지 노부타다(佐冶信忠·61·사진) 회장 겸 사장이 “눈앞의 흑자에 연연할 필요 없어. 지금은 투자야”라며 단호하게 말허리를 잘랐던 것.

다른 회사라면 흑자를 못 내게 하는 최고경영자(CEO)를 성토하기 위해 주주들이 들고 일어나겠지만 산토리에서는 그럴 일이 없다. 사지 회장 등 창업자 일가가 주식의 대부분을 갖고 있는 데다 상장조차 안 돼 있기 때문이다.

산토리가 상장을 마다하는 이유는 주식시장에서 이러쿵저러쿵 간섭을 받기 싫어서다. 이익의 3분의 1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원칙에 따라 문화예술계에 거액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것도 비상장기업이라서 가능한 일이다.

일본 4위의 대부호, 대주주이자 CEO인 사지 회장은 산토리에서 제왕이나 다름없는 존재.

하지만 그조차도 청량음료 신제품 개발에는 간섭할 수 없다. 제품 개발, 포장 디자인, 이름 짓기가 끝난 뒤 실무팀으로부터 사후승인을 위한 보고를 받는 게 전부다.

그가 부사장이던 시절의 일화. 그는 기능성 음료 ‘다카라’의 발매 직전 보고를 받고 “이런 이름으로는 절대 안 팔린다”며 맹렬히 반대했으나 실무팀은 한발도 양보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결과는 대히트.

‘제왕’조차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실무팀의 비밀병기는 ‘일기(日記)조사’로 불리는 고객 수요 조사다.

일반 마케팅조사와 달리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잠재 수요를 깊숙이 파고드는 일기조사는 산토리에 ‘고객보다 고객을 더 잘 아는 기업’이라는 별명을 붙여 놓았다.

산토리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 출범과 함께 일본 사회의 마케팅 키워드가 ‘보수’가 될 것이라는 점을 예견하고, ‘상식과 달리 스포츠음료는 운동이 끝난 다음이 아니라 아침에 마신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도 일기조사 덕분이라는 후문이다.

산토리는 과거 주력제품인 위스키 ‘산토리 올드’의 판매량이 1981년 이후 25년간 25분의 1로 줄었지만 청량음료 부문에서 히트상품이 줄을 이으면서 지난해 사상 최대의 경상이익을 냈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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