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천광암]‘취업 빙하기’ 살아남는 법

  • 입력 2007년 3월 22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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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신조어를 만드는 데 남다른 관심과 재주를 가졌다.

혼전 임신으로 부랴부랴 서둘러 하는 결혼을 미국에서는 ‘엽총결혼(shotgun wedding)’이라고 한다. 아버지가 딸을 임신시킨 청년에게 엽총을 들이대며 “내 딸을 책임질래, 총 맞을래?”라고 위협하는 모습에서 생겨난 속어다. 그러나 서부개척시대에나 통용됐을 법한 이런 유행어는 21세기 일본에서 상상하기 어렵다. 같은 경우를 일컫는 말도 데키찻다(생겨버렸다)혼, 더블 해피(이중 행복)혼, 사즈카리(점지)혼 등 젊은 층의 ‘쿨’한 감성을 반영한 신조어가 홍수처럼 넘친다.

그해 가장 널리 회자된 신조어를 선정하는 유행어 대상 시상식은 일본의 연말 최대 이벤트 중 하나다. 1990년 이후 유행어 대상 상위 수상 목록을 보면 청년실업 관련 신조어가 유독 많이 눈에 띈다. 그 변천 과정은 4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1단계는 ‘취업빙하기’. 1992년 한 취업 잡지는 거품 붕괴와 함께 찾아온 혹독한 취업난을 공룡을 멸종시킨 빙하기에 비유해 선풍적인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채용시장 위축현상이 장기화하면서 일본사회의 시선은 취업난으로 인한 생활상의 변화로 옮아간다. 1998년과 1999년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린 사회적 히키코모리(외출하지 않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와 패러사이트 싱글(parasite single·부모에게 ‘기생충처럼’ 얹혀사는 독신자)’이 2단계 유행어다.

3단계는 ‘니트족’이다. 2004년 일본 정부의 고용통계 조사 결과 취업도, 공부도, 집안일도 하지 않는 25∼34세 청년층의 실체가 처음으로 드러난다. 취업할 의욕을 완전히 상실해 청년실업 통계에도 잡히지 않던 니트(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족이 52만∼85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에 일본사회는 경악했다.

4단계는 ‘하류사회’로 넘어간다. 2005년 출판돼 그해에만 5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 하류사회에서 저자 미우라 아쓰시(三浦展) 씨는 지칠 대로 지친 청년들이 중산층의 꿈을 접고 하나의 사회계층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통찰해 냈다.

청년실업에 관한 유행어가 넘쳐 나기는 한국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 사례에 비춰 보면 아직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과 이구백(20대 90%가 백수)처럼 아직 성격상 1, 2단계에 해당하는 유행어에 그친다. 바꿔 말하면 더 혹독한 3, 4단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정부가 청년실업문제를 해결해 주면 좋겠지만 기대는 일찌감치 접는 게 좋을 것 같다. 민간경제에 시시콜콜 끼어들어 창의적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는 정부는 일자리 창출을 방해할 뿐이다.

하지만 자구책은 과연 있는 걸까. 이 물음에 힌트가 될 만한 일본의 신조어가 ‘리벤지(복수 또는 설욕) 전직’이다.

바늘구멍처럼 좁은 취업문 앞에서 현실과 타협하기를 포기하고 이상만을 고집했던 청년 대다수는 거듭되는 실패에 의욕과 희망을 잃어버렸다. 본인이 의욕이 있다한들 황금 같은 20대를 초보적인 사회생활조차 경험해 보지 못하고 허송한 취업재수생을 채용할 기업은 거의 없다. 반면 빙하기를 견뎌 내기 위한 방편으로 ‘하향 취업’을 선택했던 이들은 경기회복과 함께 찾아온 채용시장의 봄바람을 타고 자신이 꿈꿔온 직장으로 속속 상향 전직 중이다.

일본의 리벤지 전직 그룹처럼 이상을 조금만 낮춰 두고 취업난의 설움을 단숨에 설욕할 멋진 미래를 기약해 보는 것은 어떨까.

천광암 도쿄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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