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크 대선 불출마 선언…무대 내려온 ‘매력적 변덕쟁이’

  • 입력 2007년 3월 1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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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여러분께서 부여한 임기가 끝나 가고 있습니다.…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여러분께 봉사할 때가 왔습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11일 TV 연설을 통해 4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사실상 정계 은퇴 의사를 밝힌 것.

1962년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의 참모로 정계에 입문한 뒤 파리시장, 총리, 대통령을 두루 거치고 45년의 정치 인생을 마감하는 의미 깊은 연설이었다.

▽레임덕 최소화 역시 ‘고단수’=시라크 대통령이 3선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은 오래전부터 유력하게 나돌았다. 그럼에도 불출마 공표를 이날까지 최대한 늦춘 것은 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레임덕)을 최소화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

그는 10분간의 짧은 연설에서 “프랑스인들은 극단주의와 인종 차별을 배격해야 하며 유럽연합(EU)을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권 대선주자인 니콜라 사르코지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지만 그는 이날 끝내 지지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은퇴 선언을 하면서도 지지 선언을 유보함으로써 영향력을 끝까지 유지하려는 노련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영욕의 45년 정치 인생=시라크 대통령은 이라크전쟁에 반대하며 미국의 일방주의를 견제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그러나 경제 회복, 사회 개혁 등 국내 문제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지적된다.

그는 ‘강력한 공화국’을 주창하는 전형적인 드골주의자다. 1995년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핵실험 재개를 발표해 국제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국익을 앞세워 핵실험을 강행했다.

2003년 그는 이라크전쟁 반대를 주도했다. 더불어 중동문제 해결과 아프리카 빈곤 퇴치에 적극 개입하며 국제 여론을 주도하는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시라크 대통령은 2005년 국민투표에서 유럽 헌법이 부결되면서 정치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어 그해 말 대도시 교외 지역에서 터진 대규모 소요 사태로 지지율이 급락했다. 높은 실업률과 재정적자 심화, 국가 경쟁력 약화를 불러온 경제 정책 성적도 신통치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때로 위기에 처하면 정치적 견해를 바꿔 가며 국면을 능란하게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카멜레온 보나파르트’ ‘매력적인 거짓말쟁이’ ‘변덕이 심한 바람개비’ 같은 부정적인 별명들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영국 언론 매서운 반응=국내외 반응은 찬사와 비난으로 엇갈렸다. 장피에르 라파랭 전 총리와 바이루 후보는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사회당의 로랑 파비위스 전 총리는 “시라크 재임 기간에 프랑스는 시간을 낭비했다”고 비판했다.

영국 언론들의 비판은 더욱 매서웠다. 일간 텔레그래프는 “누군가가 은퇴할 때는 좋은 것들만 얘기하기 마련이지만 시라크 대통령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기 어렵다”고 보도했다. 가디언은 그를 “변덕쟁이”라고 지칭했으며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영원한 기회주의자”라고 꼬집었다.

그러나 FT는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을 추방한 프랑스의 전과를 용기 있게 인정했다”고 치켜세운 뒤 “미국의 일방주의 정책에 반대하면서 ‘늙은 유럽’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파리=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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