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힘만 동경 ‘모순의 근대화’를 보는 3가지 시선

  • 입력 2007년 2월 20일 20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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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민족사관을 대표하는 단재 신채호의 말이다. 요즘 말로 옮기면,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타자)의 대결이 역사의 고갱이라는 의미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가 깊숙이 배인 역사관이 아닐 수 없다. 단재는 일본제국주의에 투철하게 저항했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역사관은 거꾸로 뒤집으면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통치 논리에도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다. 지독한 모순이다.

이 모순은 한국 만의 것이 아니다. 한편으론 열강의 침략에 맞서고 다른 한편으론 그 열강의 뒤를 쫓아야했던 중국, 그리고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 내재된 공통 분모다. 그런 공통점을 성찰할 수 있는 책 3권이 나란히 출간됐다.

중국 근대화 사상의 효시로 꼽히는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 사상을 분석한 '량치차오: 문명과 유학에 얽힌 애증의 역사'(이혜경 저·태학사)가 그 중 하나다.

역사교과서에서 량치차오는 서양식 제도를 적극 도입하려 한 청말의 변법자강(變法自彊)운동의 주역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는 1900년대를 전후한 10년간 조선에서 발행된 거의 모든 계몽잡지에 등장할 만큼 단재를 포함한 조선 지식인의 근대인식에 막대한 영향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 교토대에서 중국사상사로 학위를 받은 이혜경 박사는 량치차오로부터 동아시아 근대의 전형으로서 국가주의와 도덕주의의 결합을 읽어낸다. 중체서용(中體西用)으로 요약되는 그의 사상에서 '중체'는 유학으로 대표되는 도덕주의라면 '서용'은 제국주의적 침략논리를 내면화한 국가주의라는 설명이다.

량은 서구문물을 문명이란 보편가치로 동경하면서 근대화를 성취한 민족(국가)과 그렇지 못한 민족(국가)의 적자생존 게임으로 세계사를 인식했다. 그 문명의 본성에는 개인의 해방이 숨쉬고 있었지만 약소국 국민이었던 량에겐 개인보다 민족과 국가가 우선했다.

여기서 서구문명을 따라잡는 동시에 그 한계까지 극복할 수 있는 보완의 사상으로서 유학의 재발견이 이뤄진다. 유학을 통해 강한 문명국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 심지어 자유와 평등과 같은 권리조차 개별 국민이 갖춰야할 덕으로 둔갑하는 기묘한 전도(顚倒)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연세대 이경훈 교수 등이 1941년 12월 진주만침공 직후 반전주의에서 전쟁지지로 돌아선 일본 일급지식인들의 좌담을 번역한 '태평양전쟁의 사상'(이매진)도 이런 기이한 전도 현상의 정점을 보여준다.

일본 지식인들의 좌담에 따르면, 태평양전쟁은 영미에 대한 침략전쟁이 아니다. 오히려 서구의 산물로서 근대의 극복과 초월을 위한 해방전쟁이라는 것. 서구가 이루어낸 근대문명은 척결돼야 할 병폐이므로 태평양전쟁은 "근대문명이 초래한 인간 정신의 질병에 대한 근본 치료"로 옹호된다.

동양 대 서양의 대결관이나 동양의 도덕주의를 통해 근대문명의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는 이런 논리에서 '아와 피아의 대결'의 발상을 읽을 수 있다. 또한 '미완의 근대'를 '근대의 초극'으로 뒤집으려는 그들의 심리에서 서구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나려는 동아시아 공통의 집단초조감을 발견할 수 있다.

문승숙 미국 바서대 교수의 2005년 영문저술을 번역한 '군사주의에 갇힌 근대'(또 하나의 문화)는 1963~2002년이라는 좀더 가까운 시기 한국의 근대화를 여성학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해부했다. 특히 한국의 근대화 과정 이면에 효율과 규율을 강조하면서 개인을 억압하는 집단주의 문화로서 군사주의가 어떻게 작동했고 어떻게 극복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결국 한국의 근대는 여전히 '미완의 근대'이면서 동시에 '탈근대'를 꿈꾼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근대의 전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서구적 근대의 기묘한 변종이 아니라 동아시아 근대라는 '새로운 근대'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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