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스, 독재국가에 웃음 보이다

  • 입력 2007년 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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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철학을 바꾼다?’

미국 워싱턴의 정책통 사이에선 납득할 만한 사유가 없다면 이런 일은 ‘정치적 자해행위’로 간주된다.

그런데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지난 6, 7년 동안 철학의 흐름이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사이를 오락가락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뒤집어 보면 그만큼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9·11테러 이후 이라크전쟁을 시작한 뒤로 곡예를 하듯 정책을 펴야 하는 ‘뼈아픈 현실’에 처해 있다는 말이다.

라이스 장관은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국가를 순방 중이다. 그는 15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외교장관회담에서 “미국은 이집트를 대단히 소중한 전략적 상대로 본다.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오랜 시간을 내 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불과 1년 전 같은 곳에서 “민주질서가 확립된 사회로의 진전이 요구된다”고 일갈하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중동 전문가들은 현지 언론에 나타난 라이스 장관의 변화를 주목했다. 뉴욕타임스는 16일 “미국이 이집트를 민주주의보다는 지역 안정을 우선시하는 시각으로 보고 있다”고 풀이했다.



▽키신저 문하생=라이스 장관은 오랜 기간 강대국 사이에 세력 균형을 이룸으로써 지역별 안정을 확보할 때 미국의 국익이 극대화한다는 믿음을 가져 왔다. 바로 세력균형론자다. 그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 안보보좌관이었던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라는 걸출한 공화당 안보전략가의 적통을 이은 소장학자였다.

라이스 장관의 견해는 텍사스 주지사이던 부시 후보를 위해 대통령선거 운동 기간 중이던 2000년 격월간지 포린 어페어스 1·2월호에 쓴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어떻게 정책적 균형을 잡느냐를 잘 따져야 한다. 물론 인권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인도적 지원을 위한 미국의 개입은 대단히 드물어야 한다”고 썼다. 2006년의 라이스 장관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법하다.

▽철학의 절충=라이스 장관의 생각을 바꾼 계기는 9·11테러였다. 테러리스트와 싸우려면 중동 아프리카 독재 국가의 체질 개선이 필요했다. ‘소련의 팽창을 막아준다면 미국의 친구’라는 냉전시대 논리가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는 “(민주정부 수립을 통한 지역안보 추구라는) 이상주의에 부합하는 (강대국 간의) 세력 균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권의 캐릭터가 친구의 기준=2005년 1월 18일 라이스 장관은 조지타운대에서 ‘변환 외교(transformation diplomacy)’라는 화두를 던졌다.

핵심은 이렇다. 정규 국가로선 당분간 미국에 위협이 될 나라가 없는 만큼 불량 정권 내부에서 자라나는 테러 집단이 최대의 적이다. 따라서 미국은 외교 상대방이 민주지향이냐 독재지향이냐 ‘근본적 속성’을 따지겠다는 것이다.

물론 라이스 장관은 이날 연설에서도 “자유를 보장하는 세력 균형도 필요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의 연설은 그가 엄연한 이상주의로 거듭났다는 점을 확인해 준다.

이런 변신에는 사담 후세인이 제거된 이라크에서 발견된 ‘민주주의의 맹아(萌芽)’가 버팀목이 됐다.

▽오늘의 라이스는?=15일 이집트 연설만으로 그가 과거의 현실주의자로 돌아섰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부시 대통령의 이상주의를 철학으로 삼게 됐지만, 중국 러시아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처럼 독재국가의 현실적 지원이 불가피하다는 ‘쉬운 셈법’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보는 쪽이 진실에 가깝다. 전술적인 일보 후퇴라는 분석이다.

라이스 장관은 지난해 12월 워싱턴포스트를 방문해 기자 및 논설위원과 환담을 나눴다. 그때 그는 “서방세계는 억압된 중동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변명해 왔지만, 미국의 안보는 지켜지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안전보장은 결코 자유를 희생하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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