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것이 바로 명성황후를 찌른 일본자객의 칼"

  • 입력 2006년 8월 8일 16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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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를 시해한 칼로 알려진 히젠도(肥前刀).(사진제공=MBC 2580)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로 알려진 히젠도(肥前刀).(사진제공=MBC 2580)
히젠도(肥前刀)를 빼고 있는 궁사.(사진제공=MBC 2580)
히젠도(肥前刀)를 빼고 있는 궁사.(사진제공=MBC 2580)
쿠시다 신사 내부. 신전(神殿)의 모습.(사진제공=MBC 2580)
쿠시다 신사 내부. 신전(神殿)의 모습.(사진제공=MBC 2580)
“一瞬電光刺老狐(일순전광자노호-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자객의 칼로 알려진 ‘히젠도’(肥前刀)에 적혀있는 글귀다. 이 칼이 일본 후쿠오카 쿠시다 신사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조선왕조실록환수위(공동의장 정념, 철안 스님) 간사인 혜문 스님은 8일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된 일본자객의 칼이 일본 신사에 기증돼 지금까지 남아 있다”며 직접 촬영한 ‘히젠도’ 사진을 공개했다.

스님은 지난 1일부터 3박4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혜문 스님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쿠시다 신사에 보관되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신사를 방문했다”며 “신사 관계자는 대단히 난처해했지만 결국 칼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스님은 “쿠시다 신사의 책임자인 아베 켄노스케(阿部憲之介) 궁사가 상기된 얼굴로 자주색 보자기에 싼 칼을 풀러 놓았을 때, 가슴 한쪽에서 피가 울컥 쏠리는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스님은 또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칼 주인이 시해 당일 작전명 ‘여우사냥’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一瞬電光刺老狐’ 글귀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며 “칼집에서 꺼낸 전체 길이 120㎝, 칼날 90㎝의 칼이 뿜어내는 살기가 방안을 서늘하게 흥분시켰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궁사는 스님에게 “칼은 16세기 에도시대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명검으로 제작당시 전투용이 아니라 사람을 베기 위한 살상용으로 만들어졌다. 명치 41년(1908) 토오 가쯔아키(藤勝顯)란 분이 신사에 기증했다고만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스님은 “토오가 이 칼을 기증할 당시의 문서를 보면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 고 적혀 있다”고 따지자 궁사는 별다른 반응 없이 머리만 끄덕였다고 전했다.

궁사는 이어 “토오가 정말 명성황후를 절명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왕비의 침실에 난입한 사람 중 하나란 것은 맞다. 사건 당시 왕비는 궁녀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그가 살해한 사람이 궁녀일 수도 있고…”라며 말끝을 흐렸다고 스님은 전했다.

한편 혜문 스님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MBC ‘시사메거진2580’팀과 함께 신사를 방문했으며, 관련 내용은 오는 13일 오후 10시35분 방영될 예정이다.

2580팀은 이날 방송에서 토오 가쯔아키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참회 과정에서 히젠도를 일본의 한 절에 기증하려 했으나, 절에서 거부해 결국 신사에 기증하게 됐다는 내용이 적힌 문서 등을 공개할 것으로 알려졌다.

◆토오 가쯔아키(藤勝顯) =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난입한 세 사람 중에 하나로 알려져 있다. 당시 사건 용의자들의 수기와 증언을 기록한 일본의 문필가 쯔노다 후사꼬의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에 실린 데라사키의 편에는 ‘나카무라 다테오, 토오 가쯔아끼, 나(데라사키) 세 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왕비의 방으로 들어갔다’고 기록돼 있다.

구민회 동아닷컴 기자 dann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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