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광서 죽어나간 한국인 셀 수도 없어”

  • 입력 2006년 3월 17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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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에 찍힌 엄지발가락아소탄광 강제동원 피해자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강성향 씨. 그는 탄광에서 일할 때 다쳐 시커멓게 변한 엄지발가락(아래 사진)을 내보였다. 사진 제공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돌에 찍힌 엄지발가락
아소탄광 강제동원 피해자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강성향 씨. 그는 탄광에서 일할 때 다쳐 시커멓게 변한 엄지발가락(아래 사진)을 내보였다. 사진 제공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사죄라도 받지 못하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다.”

이유도 모른 채 아소탄광에 끌려가 고된 노동을 해야 했던 강제동원자 가운데 첫 생존자로 확인된 강성향(姜聖香·84·경북 영주시) 씨는 대뜸 엄지발가락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엄지발가락은 당시 발파작업 중 떨어진 돌에 맞아 뭉개졌다. 지난 세월 속에서 타버린 그의 마음처럼 새까만 발톱이 드러났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탄광에서 돌에 맞아 죽은 한국인이 셀 수도 없어…. 탄광 밖에서 잠깐 쉬고 있을 땐 죽은 사람, 다친 사람을 싣고 나오는 수레가 탄광을 들락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

강 씨의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처자식을 고향인 영주시에 두고 일본으로 떠났다. 강 씨는 4세 때인 1926년 어머니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 시에 자리 잡았다.

그는 일본에서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한 전기회사에서 근무했다. 21세 때인 1943년 3월 신체검사 통지서를 받았다.

강 씨는 며칠 뒤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동천경찰서를 찾았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 들렸다. 일본 순사가 신체검사에 불합격한 한국인을 때리고 있었던 것. 강 씨는 “아픈 데 있느냐”는 의사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강 씨는 이틀 뒤 재일 한국인 34명과 함께 기차를 타고 한 절에 도착해 3일간 정신교육을 받고 후쿠오카(福岡) 현 아소(麻生)광업주식회사 산하 아카사카(赤坂)탄광에 배치됐다. 그는 이곳에서 5개월 동안 탄광에서 발생하는 유해가스를 중화하는 약을 뿌리는 일을 했다.

재일 한국인과 달리 한국에서 끌려온 강제동원 피해자 수천 명은 가장 힘들고 위험한 채탄공이 됐다. 조마다 배치된 일본인 지도원 2, 3명이 한국인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하루 8시간씩 3교대로 일하게 돼 있었지만 배당량을 채우지 못해 하루 10시간이 넘게 일하는 한국인이 태반이었다.

게다가 안전 설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사상자가 속출했다. 40도를 웃도는 탄광에서 배출되는 유해가스에 중독돼 잠들었다가 천장에서 떨어지는 돌에 맞아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매일 수레에 실려 나왔다.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낸 강 씨는 1943년 8월 귀가할 수 있었다. 강 씨 가족은 1945년 광복을 맞자마자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강제동원자의 상당수가 죽거나 다쳐서 돌아왔다”며 “어머니가 매일 집 근처 절에서 울면서 나를 위해 기도했다”고 말했다.

강 씨는 일본의 일부 정치인이 ‘자발적인 계약으로 일본에 온 사람도 많았다’고 주장한 데 대해 “미친 소리”라며 벌컥 화를 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 탄광에 끌려간 것이 강제동원이 아니라면 어떤 게 강제동원이냐.”

강 씨는 “뻔뻔한 일본의 사죄를 받기 전에는 죽더라도 이 한을 풀지 못할 것 같다”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1943년 한국인 동료들과 함께
1943년 8월 일본 후쿠오카 현 이즈카 시 아카사카탄광 앞에서 재일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 34명과 함께 사진을 찍은 강성향 씨(가운데 원 안). 사진 위에는 ‘오사카부 대정근로보국대 기념’, 아래에는 ‘아소광업주식회사 쓰나와키광업소 아카사카갱’이라는 글자가 있다. 앞줄에 군복 비슷한 제복을 입은 3명은 일본인 지도원. 사진 제공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 아소탄광이란

일본 규슈(九州) 후쿠오카 현 이즈카(飯塚) 시에 있던 아소광업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 한국인을 혹사한 탄광으로 유명하다. 아카사카탄광 등 7개 탄광을 거느리고 있던 아소광업은 1969년 석탄산업에서 손을 떼면서 ㈜아소로 바뀌었다. 현재 일본 아소 다로(麻生太郞) 외상의 동생인 아소 유타카(麻生泰) 씨가 사장을 맡고 있다.

일본 후생노동성 자료에 따르면 지금까지 밝혀진 아소탄광 강제동원 피해자는 1만623명이다. 미쓰비시(三菱)광업의 1만3390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이들 가운데 절반가량이 작업 중 사고와 일본인 현장감독의 구타, 굶주림 등으로 숨지거나 도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소탄광 폐광지역 인근의 한 납골당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 6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한국 정부가 아소탄광에 대한 한일 공동조사를 일본 측에 제의했으나 일본 측은 이를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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