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워치]호주 ‘인종 충돌’ 사흘째 폭력사태

  • 입력 2005년 1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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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낮에 둘러본 시드니 남부 코로눌라 해변은 고요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호주의 해변이었다. 평소보다 많은 경찰관이 순찰을 돌고 해외에서 온 기자들이 취재에 열을 올리는 풍경이 조금 낯설어 보일 뿐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백인계와 중동계 호주인 간의 피의 보복전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틀 전 코로눌라 해변에서 대규모 선제공격을 당한 중동계 청년들이 이번 주말을 ‘D-데이’로 잡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무슬림 전통방식의 보복을 다짐하고 있어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 당국과 경찰을 긴장시키고 있다. 12일 밤 시드니 서부 라켐바의 이슬람 사원에 모인 중동계 청년 수백 명은 “무슬림 형제들이여, 주말에 모이자”며 오는 일요일 코로눌라 해변 집결을 호소하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동족들에게 보냈다.

사태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한인 사회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199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 때와 같은 상황으로 번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당시 폭동은 백인 경찰의 흑인 청년 구타 사건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엉뚱하게 한인 가게가 약탈의 대상이 됐다. 물론 이번 호주 인종 폭동 사태를 그때와 직접 비교하긴 어렵고, 아직 한인 피해가 보고된 것도 없다.

하지만 김창수 시드니 주재 총영사는 “이번 사태의 당사자인 레바논 커뮤니티가 한인 밀집 거주지역인 캠시와 이웃하고 있어 교민의 신변안전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동계 청년들은 사건 발생 다음 날에도 코로눌라 해변으로 몰려가 차량과 상가의 유리를 파손하고 반발하는 여성을 칼로 찌르는 등 복수를 계속했다.

해변에서 축구를 즐기던 중동계 청년들과 수상 안전 요원들의 싸움이 왜 이런 인종 폭동으로 번진 것일까?

13일 코로눌라 해변에서 만난 케이사르 트라드 이슬람 우정협회 회장은 사소한 사건이 이렇게 커진 이유에 대해 “미디어가 청소년들 간의 싸움을 인종 갈등으로 비화시켰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호주의 대표적 무슬림 지도자인 그는 “이는 인종차별금지법에 저촉되는 사항이기 때문에 앞으로 법적 대응도 불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레바논계 청년들이 백인 수상안전요원들을 구타한 사건이 알려진 직후 호주 유명 라디오 토크 백 프로그램(전화대담) 진행자들은 “백인 수상안전요원이 레바논 갱들에게 구타당한 일은 용납할 수 없다. 그들을 응징하자”는 선동 방송을 내보냈다. 11일 아침 코로눌라 해변에 약 5000명의 백인계 호주인들이 모여든 것도 그런 선동 방송과 무관치 않았다.

막 CNN 인터뷰를 마친 그를 붙들어 세웠다.

―어제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 경찰, 그리고 백인계 지역인사들과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대책이 나왔나.

“빨리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정부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찰 당국은 소요 진압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중동계 문제로 한국계를 포함한 이민자 그룹 전체가 불안해하고 있다.

“그 점은 안타깝지만 호주엔 소수민족 문제가 상존해 왔다. 10여 년 전엔 베트남계, 20여 년 전에는 이탈리아계, 그 이전에는 아일랜드계가 문제를 일으킨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다수 그룹인 백인들이 관용의 정신을 망각하면 호주의 다민족, 다문화주의는 큰 위협을 받게 된다.”

지금 호주는 연일 30도를 훨씬 웃도는 폭염 속에서 1970년대 초 공식 폐지된 ‘백호주의(白濠主義)’의 악몽이 다시 떠오르고 있는 듯하다.

윤필립 주간동아 통신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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