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위기 필리핀 아로요, 내각제 개헌으로 물타기

  • 입력 2005년 8월 2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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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이 내각제 및 연방제 개헌이라는 승부수를 띄웠다. 대통령선거에서의 부정 의혹과 친인척 부패에 따른 퇴진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노림수는 일단 성공해 필리핀 정국이 탄핵에서 개헌 정국으로 급속도로 옮겨가고 있다. 하지만 헌법을 정권 연장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비판도 만만찮다.

▽정국 돌파 노림수=야당이 대통령 탄핵안을 제출한 지난달 25일 아로요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내각제 개헌을 추진할 것을 시사했다. 그는 “미국식 대통령제가 부정부패와 경제부진의 원인”이라며 “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피플 파워’로 축출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대통령제 때문에 필리핀이 무정부 상태로 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정치 개혁보다는 ‘탄핵 정국’에 대한 ‘물타기’라는 게 일반적 해석. 내각제를 도입할 경우 2010년까지인 임기를 채우기는 힘들겠지만 당장의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내각제로 ‘권력 유지’가 목적인 일부 의원을 포섭하고 연방제로 지방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전략이라고 현지 언론은 분석하고 있다.

개헌 정국을 오래 끌수록 정권 연장이 가능하다는 판단도 작용했다는 평가다. 미국의 금융그룹 베어스턴스도 지난달 22일 보고서에서 “2010년까지 아로요 대통령이 정권을 유지할 확률은 50∼60%지만 내년 1월까지 살아남는다면 가능성은 65∼75%로 높아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내각제는 만병통치약 아니다”=하지만 헌법 개정을 일시적 정국 타개책으로 이용한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최근 야당은 성명을 내고 “개헌 논의는 빈곤 실업 외채 등 필리핀의 정치적 위기를 호도하려는 시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나아가 필리핀 정치 현실에 내각제가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로이터통신은 인물 위주 정당체제, 잦은 이합집산, 군소정당의 난립 등 필리핀의 후진적인 정당문화하에서 내각제가 도입되면 정부가 수시로 교체돼 정치적 불안정이 심해질 것이라고 최근 평가했다. 또 소수의 유력한 가문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내각제를 도입하면 이들에 의한 과두 지배가 고착화될 뿐이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정치체제의 변화보다는 헌법 테두리 안에서 투명하게 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위기 때마다 단기 해법 난무=무엇보다 현 상황에서는 내각제 개헌이 성사되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지적이다. 필리핀 헌법에 따르면 개헌안 제안은 △상하원 전체 의원의 4분의 3 이상의 찬성 △상하원 전체 의원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에 의한 별도의 헌법회의 소집 등을 통해 가능하지만 야당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실현 가능성은 낮다.

이는 위기에 처한 정권이 근본적인 문제 해결보다는 정국 돌파용 카드로 위기를 돌파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을 되새기게 한다. 지지율 하락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 독일 사민당은 최근 정치적 기반이 전혀 다른 기민련(CDU)에 ‘대연정’을 제안한 바 있다. 권력형 비리로 몸살을 앓은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도 제1야당과의 연정 강화, 보수세력 비판을 통한 지지세력의 결집으로 위기 돌파를 시도하고 있다. 필리핀의 개헌 정국도 이와 다르지 않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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