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공영방송 ‘자존심’ 끝없는 추락

  • 입력 2005년 2월 13일 18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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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東京)에 사는 회사원 이데 미쓰야(井出光哉·40) 씨는 두 달에 한 번씩 NHK에 내던 컬러TV 시청료 2790엔(약 2만7900원)을 작년 말부터 내지 않는다. 징수 직원이 몇 차례 찾아와 ‘제발 내달라’고 읍소했지만 “내 지갑에서 나온 돈이 엉뚱한 데 쓰이는데 왜 내야 하느냐”며 매몰차게 거절했다.

이데 씨는 “NHK가 하는 행동이 너무 한심하다. 항의 표시로 시청료를 내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요즘 직장에서는 ‘아직도 시청료를 내느냐’는 말이 유행할 정도”라고 말했다.

영국 BBC 방송과 함께 세계 공영방송의 모델로 자부해온 NHK가 1950년 창립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이 위기는 외부에서 닥쳐온 것이 아니라 NHK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사태는 직원들의 자금횡령 행각이 잇따라 드러나면서 시작됐다. 이어 일본군위안부 고발 프로그램을 집권 자민당의 입맛에 맞춰 축소 방영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사태를 관망하던 시청자들마저 대거 시청료 납부거부에 동참하는 사태로 번지고 있다.

▽방만 경영에 시청자 분노=1월 말 현재 시청료 납부 거부는 39만7000건. 작년 12월과 올 1월 두 달에만 28만4000여 건이 늘었다.

발단은 지난해 여름부터 불거져 나온 직원들의 자금 횡령이었다. ‘가요 홍백전’ 등 NHK의 간판 프로그램을 제작해온 중견 PD가 방송 제작을 외부에 맡기면서 제작비의 절반가량을 착복한 사실이 드러났다.

자체감사 결과 문제의 PD 외에도 가짜 영수증을 첨부해 돈을 타간 사례가 속속 적발됐다. 시청료 착복, 출장비 과다 청구, 제작비 허위 수령 등 온갖 수법이 드러났다.

씀씀이가 큰 직원 복지 실태도 도마에 올랐다. NHK가 2003년 직원들에게 업무 및 출퇴근용으로 제공한 택시 승차권은 43억 엔어치. 직원 한 사람이 연간 35만 엔의 택시 승차비를 타간 셈이다.

1인당 연간 복리후생비는 214만 엔으로 경단련(經團連)에 가입한 대기업 평균치(120만 엔)의 두 배에 가깝다. 이러니 장기불황으로 허리띠를 졸라맨 시청자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시사주간 아에라는 전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에비사와 가쓰지(海老澤勝二) 전 회장이 8년 6개월간 장기 집권하면서 쌓인 각종 문제로 인해 시청자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에비사와 전 회장이 요직에 자기 사람을 심고 경영에도 전횡을 일삼은 결과 내부감시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해 9월 국회가 NHK 회장을 출석시켜 청문회를 열자 NHK는 ‘무엇을 방영할지, 방영하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방송사 고유의 편집권한’이라는 논리로 생중계를 하지 않았다. 국회 상임위까지 자주 생중계한 점을 감안할 때 설득력이 없다는 지적을 받자 이틀 뒤 청문회 장면을 억지로 내보냈다. 그러면서 한 의원이 회장에게 ‘물러날 의사가 없느냐’고 추궁하는 대목은 쏙 빼버렸다.

▽공정성 논란으로 신뢰위기 직면=직원 비리가 일시적 성격의 문제라면 보도 및 프로그램의 공정성 논란은 존립 근거를 뿌리부터 흔드는 문제.

NHK가 2001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프로그램을 아베 신조(安倍晋三) 자민당 간사장 대리와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경제산업상 등 실력자들의 압력으로 축소 방영했다고 아사히신문이 보도하자 NHK는 이를 부인했다.

그러다 제작 간부가 국회를 찾아간 사실이 밝혀지자 이번엔 외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업무협조 차원에서 스스로 자민당에 방송 내용을 설명한 것이라고 둘러댔다. 이 프로는 결국 고위층의 지시로 ‘위안부 제도는 인도에 어긋나는 죄이며 일본 국왕에게 책임이 있다’는 결론 부분을 대폭 줄여 방영됐다.

그러나 방송총국장은 “방송 내용에 대해 정치권에 사전 설명하는 것은 통상 업무”라고 강변했다.

이 발언이 전해지자 시민단체들은 정치적 중립이라는 공영방송의 책무를 저버렸다며 분노했다. 해당 프로그램 담당 데스크는 NHK에 대한 정치 개입이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증언했다. 지식인 440명은 이달 초 시청료 거부운동을 한시적으로 벌이기로 결의했다.

시청자들의 질타가 쏟아지자 새 경영진은 임원 급여의 15% 삭감, 전문가와 시청자 대표로 구성되는 ‘평가위원회’ 신설 등을 담은 개혁안을 발표했지만 수습이 될지는 미지수다.

개혁 전망에 대한 전문가들의 진단도 엇갈린다. 그러나 영국 BBC가 공정보도와 내부개혁에 힘입어 시청료 미납률을 낮추고 신뢰를 회복한 전례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는 일치한다. BBC의 시청료 미납률은 1991년 12.7%에서 지난해 5.7%로 낮아졌고, 최근 조사에선 정부보다 BBC를 더 믿는다는 비율이 3배나 높았다.

각국 공영-국영방송의 시청료 제도

광고방송을 하지 않는 경우 광고방송을 하는 경우
영국 BBC일본 NHK한국 KBS
징수명목TV라이선스수신료수신료
연간요금(엔화 기준)2만40001만54903000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94%98%39%
미납 시 벌칙××전력공급 차단
징수방법우체국 통해 납부현장 징수공과금 납부 때 일괄 징수

도쿄=박원재 특파원 parkwj@donga.com

▼“속곪은데다 속좁기까지…” 시청자 분통▼

12일 NHK에는 속 좁은 처사를 질타하는 시청자들의 항의전화가 900통 넘게 걸려왔다. NHK가 당초 편성표에 포함시켰던 럭비 경기의 중계방송을 취소하려 했기 때문이다.

NHK는 이날 오후 열린 일본럭비선수권 대회 준준결승 도요타자동차와 와세다대의 경기를 중계키로 했다가 심판 복장에 대회 후원사인 아사히신문의 로고가 새겨졌다는 이유를 들어 방송취소 결정을 내렸다.

NHK는 ‘공영방송으로서 상업주의를 조장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이유를 밝혔다.

럭비협회가 공동 주최자인 NHK에 사전 상의를 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하지만 언론들은 일본군위안부 프로그램 축소방영 의혹을 놓고 대립 중인 아사히신문에 대한 NHK의 보복으로 받아들였다. 일각에선 공영방송이 책무를 망각하고 방송 편성에까지 사감(私感)을 개입시켰다는 지적이 나왔다.

럭비 인기가 높은 일본에서 도요타자동차-와세다대 대결은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경기. 아침 일찍부터 시청자들의 항의가 쇄도하자 NHK는 긴급회의를 열어 방송취소 결정을 번복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대신 럭비협회 측에 아사히신문과의 후원계약을 철회해달라고 요구했다.

예정대로 경기는 중계됐지만 카메라는 심판 복장을 최대한 비추지 않으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 대학교수는 “심판 옷에 찍힌 아사히신문의 로고가 방영되더라도 NHK가 중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럭비 경기”라며 “시민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로 생중계 중단을 결정한 것은 팬들을 경시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은 공영방송 개혁 촉진할것”▼

“일본 시청자들은 NHK가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고 최고의 방송을 제공해 준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시청료는 그런 믿음에 대한 대가지요. NHK 스스로 그런 신뢰를 깨뜨렸으니 불만이 폭발한 것은 당연합니다.”

일본 언론학계의 권위자 스도 하루오(須藤春夫·62·사진) 호세(法政)대 교수는 “NHK의 위기는 신뢰의 문제”라며 “다만 공영방송의 자세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는 점에서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은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시청료 납부 거부 움직임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는데….

“일부 직원의 내부 비리가 드러난 작년 말까지만 해도 사태가 수습될 여지는 충분했다. 하지만 자진해서 군위안부 프로그램 방영을 집권당 실력자들과 상의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시청자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중립은 일본사회의 자존심이다.”

―그 문제가 그렇게 심각한 것인가.

“일본 국민은 정부 예산이 아닌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NHK를 꾸려가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 그 대가로 정부 눈치를 보지 않고 시청자의 편에서 방송해 달라는 것이다. NHK는 ‘해서는 안 될 행위’를 한 것이다.”

―징수원이 직접 가정을 방문해 시청료를 받는 방식에 대해 정보화시대에 뒤떨어진 제도라는 지적도 있는데….

“징수비용이 더 들어가는 단점이 있지만 시청자들의 요구를 수렴하는 창구라는 측면에서 순기능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징수원들은 시청자의 목소리를 전하는 모니터 역할을 한다. 이번 사태에서 보듯이 시청료 납부거부는 큰 압력수단으로 작용해 공영방송 개혁을 촉진하는 효과를 낸다.”

스도 교수는 “시청료를 공과금과 함께 징수하는 한국의 제도가 경제적으로는 효율적일지 몰라도 시청자와 공영방송의 건전한 긴장관계를 조성한다는 점에서는 일본식이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도쿄=박원재 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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