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안먼 사태’이후 16년 연금 자오쯔양 사망

  • 입력 2005년 1월 17일 1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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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평가는 빠른 시일 안에 이뤄져야 하며 지금처럼 안정된 시기에 능동적으로 하는 것이 문제가 발생한 뒤 마지못해 하는 것보다는 낫다.” 자오쯔양(趙紫陽)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생전에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이렇게 원했다. 그러나 현실 정치의 벽을 넘지 못하고 17일 사망함으로써 그의 비원(悲願)은 중국 민주화의 과제로 남았다.>>

▽불운의 지도자=학생과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가 약 한 달째 계속되던 1989년 5월 19일 저녁. 인민복 차림의 자오 전 총서기가 톈안먼 광장에 나타났다. 베이징(北京)에 계엄령이 선포되기 하루 전.

무력 진압에 반대했던 그는 시위대에 눈물을 글썽이며 “내가 너무 늦게 왔다. 여러분들이 제기한 문제는 언젠가 해결될 것”이라며 단식농성을 풀 것을 애원했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톈안먼 시위는 유혈 참극으로 막을 내렸고, 그는 6월 23일 당 제13기 중앙위원회 4차 전체회의에서 총서기직을 박탈당했다.

이후 그는 16년간 자택에 연금됐다. 간간이 지방여행이 허용돼 베이징 근교 골프장에서 모습이 목격됐을 뿐이다.


허난(河南) 성 화(滑) 현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3세 때인 1932년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해 1987년 총서기에 오를 때까지 순풍 가도를 달렸다. 1967년 문화대혁명 때 잠시 어려움을 겪었을 뿐이다.

그는 톈안먼 사태로 덩샤오핑(鄧小平)의 버림을 받을 때까지 덩의 경제개혁을 실무에서 지휘했다. 쓰촨(四川) 성 당서기 시절이던 1970년대 중후반 “식량을 구하려면 자오쯔양에게 가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농산물의 사유화를 인정한 농가생산청부제를 도입해 생산성을 파격적으로 높였던 것.

그는 경제개혁을 심화하기 위해 정치개혁이 필요하다고 인식했지만 방식은 전국인민대표대회(의회 격)를 통한 점진적 개혁이었다. 현실적 개혁론자였던 것. 그러나 당국은 톈안먼 사태를 ‘반혁명 폭란’으로 규정하면서 그에게 급진주의자라는 ‘두건’을 씌웠다.

▽향후 파장은 신중론이 우세=톈안먼 사태의 원인이 됐던 문제들은 지금도 중국 공산당의 집권을 위협하는 요소로 꼽힌다. 하지만 자오 전 총서기의 사망이 향후 정국에 미칠 전망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루쓰칭(盧四淸) 중국 인권민주화운동 정보센터 이사장은 “그의 사망이 민주화 정치개혁의 촉매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그는 “중국은 사회 불평등 현상이 심각해 자오 전 총서기 추모 활동이 사회 동요와 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며 “앞으로 이틀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반면 대부분의 정치 분석가들은 그의 죽음이 현 정국에 미칠 파장이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홍콩의 시사평론가 류루이사오(劉銳紹)는 “자오 전 총서기가 정치 전면에서 떠난 지 15년 이상 지났고, 현재의 정치 분위기와 사회구조도 1980년대와 다르다”고 지적했다.

베이징=황유성 특파원 yshwang@donga.com

▼톈안먼사태 안팎▼

“20만 명이 죽더라도 20년의 평화와 안정이 올 수 있다면 어쩔 수 없다.”

덩샤오핑은 1989년 6월 4일 톈안먼 시위를 유혈진압하도록 명령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택연금 생활중 골프를 즐기기도 했다.

중국 현대사의 최대 오점이자 자오쯔양 전 총서기의 실각 원인이 된 톈안먼 사태는 그해 4월 15일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사망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베이징(北京)대를 비롯한 각 대학에는 이튿날부터 대자보가 나붙었다. 처음에는 후 전 총서기를 추모하는 내용이었으나 점차 언론자유, 정치개혁, 부패척결, 민주화 실현 등 정치구호가 등장했다.

4월 22일 후 전 총서기의 장례식에 수십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몰리면서 본격적인 민주화 시위가 시작됐다. 리펑(李鵬) 당시 총리는 “이번 시위는 국제 적대세력의 조종에 의한 반당, 반사회주의 동란”이라고 규정하며 강경 진압을 주장했다. 그러나 자오 당시 총서기는 이에 반대했다.

자오 총서기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5월 4일 아시아개발은행 회의에서 “이번 시위는 애국학생의 애국운동”이라고 폭탄발언을 했다.

사태를 관망하던 지식인들이 그의 말에 고무돼 시위에 동참했고 5월 13일 학생들의 단식투쟁을 계기로 시민 100만 명이 “공산당 타도”와 “독재 반대”를 외치며 반정부 투쟁에 들어갔다.

5월 20일 베이징에 계엄이 선포되고 군이 투입됐으나 시위는 오히려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마침내 당국은 6월 4일 자정을 기해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무차별 사격과 함께 강제해산에 들어가 이틀 만에 시위를 유혈 진압했다.

당시 300여 명이 사망하고 7000여 명이 부상한 것으로 발표됐으나 비공식 집계로는 5000여 명이 숨지고 3만여 명이 다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 당국이 사태 진압 후 수배령을 내린 21명의 학생 지도자 중 왕단(王丹) 우얼카이시(吾爾開希) 류강(劉剛) 차이링(柴玲) 등 11명은 미국과 프랑스 등 서방으로 망명했고, 7명은 중국에 남아 있으며 3명은 행방이 묘연하다.


베이징=황유성 특파원 ys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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