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 110년… 진실은?

  • 입력 2005년 1월 13일 17시 58분


코멘트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1895년 10월 8일) 110주년을 맞아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명성황후 시해 당일의 경복궁 내 상황을 둘러싸고 몇 가지 논란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시해 장소가 어디냐는 것. 학계에서는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와 영국 영사의 보고서, 일본 측 자료 등을 토대로 명성황후 시해 장소에 대해 ○1곤령합(명성황후의 침전) 복도 ○2옥호루(곤령합에 딸린 누각) ○3곤령합 뜰 등 엇갈린 설이 있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이 사건을 다룬 뮤지컬이나 드라마 등을 통해 명성황후가 자신의 침실에서 시해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해 서울대 이태진 교수(한국사)는 13일 주한 일본 일등영사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가 시해사건 2개월여 뒤인 12월 21일 본국 외무성 부상에게 보낸 보고서가 실린 일본 외무성 편찬 자료집 ‘한국왕비 살해일건(一件) 제2권’을 공개했다. 이 보고서에는 ‘왕후폐하를 장안당(고종황제의 침전) 뒤편 뜰로 끌어내 살해한 뒤 (시신을) 곤령합 옥호루에 내려놓았다’고 기록돼 있다. 시해 장소를 ‘장안당 뒷마당’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 하지만 우치다 영사가 사건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확한 내용인지는 불분명하다고 이 사건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신국주 전 동국대 총장은 밝혔다.

사건 이틀 뒤 주한 러시아 대리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웨베르가 본국에 보고한 ‘사건 경위 보고서’(본보 2001년 9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황후가 상궁 옷을 입고 상궁 무리에 섞여 누가 황후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자 일본 낭인들은 한 명씩 끌어내 250cm 높이의 곤령합에서 뜰로 떨어뜨렸다. 두 명이 떨어진 뒤 황후가 복도를 따라 도망갔고 일본 낭인들이 쫓아가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칼로 가슴을 난자했다’고 돼 있다. 이 보고서는 사건 현장을 목격한 궁녀 및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르진 사바틴, 궁정경비대 부령 이학균 등의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이다.

주한 영국 영사 힐리어가 사건 사흘 뒤 궁녀와 명성황후의 시신을 확인한 여의(女醫) 등 현장에 있던 조선인 4명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에는 ‘명성황후는 뜰 아래로 달아났지만 결국 붙잡혀 쓰러졌고 살해범들은 황후의 가슴을 짓밟으며 몇 차례나 칼로 찔렀다. 그리고 실수가 없도록 하기 위해 황후와 용모가 비슷한 궁녀들까지 살해했다’(최문형·‘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196∼197쪽)고 기록돼 있다.

시해사건 가담자인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보고서와 가담자 재판기록 등 일본 측 자료를 연구한 신 전 총장은 “일본인들은 옥호루에 침입해 왕비로 보이는 여인 3명을 살해했는데 세 번째 여인을 죽였을 때 궁녀들이 흐느끼자 명성황후임을 직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시해 장소를 둘러싼 논란보다는 일본 정부가 이 사건에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를 입증해 책임을 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도 이 사건에 대해 사과한 적이 없다. 20여 년 동안 이 사건을 연구한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한국근대사)는 “명성황후의 시해 장소는 아주 지엽말단적인 의미밖에 없다”며 “일본 정부가 명성황후 시해를 어떻게 계획하고 지휘했는지를 실증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