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최대의 작전’ 노르망디 상륙 60돌 : 어제와 오늘

  • 입력 2004년 6월 2일 19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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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전쟁을 둘러싸고 미국 영국 등 ‘주전국(主戰國)’과 프랑스 독일 등 ‘반전국(反戰國)’의 대립이 격화됐던 지난해 2월의 어느 날. 미국 신문 뉴욕 포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들이 묻혀 있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한 묘지 사진을 1면에 크게 실었다. 그리고 이런 제목을 달았다. “그들은 프랑스를 위해 죽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잊었다.” 60년 전인 1944년 6월 6일. 바로 이 해안에서 뒷날 ‘사상 최대의 작전’으로 불린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감행됐다.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 작전이 벌어진 이 해안은 단순한 전승 기념장소가 아니다. 전후세계를 이끌어온 서방의 구심점이자 성지(聖地)다.》

▽노르망디의 ‘어제와 오늘’=6일 노르망디 해안에서 상륙작전 6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다. 이번 행사에는 당시 작전에 직접 참여했던 미국 영국 캐나다, 내륙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지원전을 벌인 프랑스, 작전 이후 동부전선 대공세로 연합군의 승기를 굳힌 소련을 이어받은 러시아 등 16개국 정상이 참석한다. 무엇보다 이들 나라와 싸우다 패전한 독일의 정상이 사상 처음 참석한다.

그러나 참석하는 정상들을 둘러싼 공기는 그때와 사뭇 다르다. 한편이었던 미국과 프랑스의 두 정상,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자크 시라크 대통령 사이에는 찬바람이 불고 있다. 시라크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이 밀어붙인 이라크전쟁의 반대를 주도한 앙금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륙에서 사투를 벌였던 프랑스와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밀착하는 양상이다. 두 나라를 연합하자는 아이디어가 양국 지도층에서 나올 정도. 양국의 이라크전 반대에 대한 미국의 보복과 유럽연합(EU) 확대로 EU 내 미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반사적으로 상호 의존도가 높아진 때문이다.

작전을 주도했던 미국과 영국만이 아직도 ‘찰떡궁합’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아이젠하워 총사령관과 영국의 몽고메리 대장이 지휘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대성공이었던 반면 부시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주도하는 이라크전쟁은 시간이 갈수록 난항을 하고 있다.

▽‘독일식 과거청산’=지난해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시라크 대통령으로부터 커다란 ‘성탄 선물’을 받았다. 이번 행사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노르망디 행사 참석은 독일 정부의 오랜 숙원이었다. 과거 연합국들이 행사 참석을 용인해야만 비로소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죄과를 청산할 수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10년 전 헬무트 콜 총리도 50주년 행사에 참석하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레지스탕스 출신인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끝내 이를 외면했다. 이 때문에 미테랑과 콜의 밀월관계가 파경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슈뢰더 총리의 이번 행사 참석은 틈만 나면 사과와 물질적 배상을 거듭해온 전후 독일 외교의 성과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어색한 만남’=슈뢰더 총리와는 달리 부시 대통령은 가장 늦게까지 행사 참석 여부를 밝히는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프랑스의 반전 주도에 대한 일종의 보복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번 기회를 미국과의 감정의 골을 메우는 기회로 활용하려 한다. 시라크 대통령은 행사 하루 전인 5일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프랑스 언론은 전했다.

그러나 시라크 대통령도 이라크전 반대의 선봉 역할을 하루아침에 거둬들일 수는 없는 처지. 그는 지난주 “우리는 (미국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곧 이어 장 피에르 라파랭 총리는 “잊지는 않았다는 게 복종한다는 뜻은 아니다. (미국에)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받고 싶다”고 발표했다. 이런 이중 플레이가 프랑스의 고민의 한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노르망디 작전 막전막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감행된 1944년 6월 6일 새벽까지도 독일군은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독일은 노르망디보다 북쪽의 파 드 칼레 해안을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 예상지역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파 드 칼레가 연합군 병력이 집결한 영국과 독일의 점령 하에 있던 프랑스를 잇는 최단거리인 데다 연합군이 파 드 칼레가 작전 지점이라는 거짓정보를 끊임없이 흘리며 기만전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전사 연구가들에 따르면 6일 새벽 작전 개시와 함께 노르망디에 연합군 공수부대가 낙하할 때까지도 독일군은 파 드 칼레 상륙을 위한 양동 작전이라고 의심했다.

독일에는 불운이 겹쳤다. 연합군 상륙작전 방어를 지휘하던 독일의 전쟁 귀재 로멜은 이날 자리를 비웠다. 같은 날 생일을 맞은 부인의 생일축하 겸 히틀러와의 작전 회의를 위해 5일 본국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로멜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 연합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로 중상을 입은 뒤 전선에서 탈락하고 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노르망디 해안을 지키던 부대 지휘관들도 6일 도상훈련을 위해 렌 등의 사령부에 집결해 있었다.

새벽에 잠자리에 드는 히틀러의 습관마저 연합군의 편이었다. 독일군 사령부는 이날 새벽 4시경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을 히틀러에게 보고하고 판단을 구하려 했다. 그러나 히틀러 보좌진으로부터 되돌아온 답변은 “총통이 얼마 전에 잠들었기 때문에 깨울 수 없다”였다. 히틀러는 6일 오후 2시반에야 노르망디 전선의 증원을 명령했다.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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