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경제 부활과 고민]<2>흥청대는 소비…부익부 빈익빈

  • 입력 2004년 5월 24일 18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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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계에서는 지난해부터 ‘디지털 경기’란 말이 부쩍 많이 쓰이고 있다. 새로운 기능을 갖춘 고가의 디지털 가전제품이 경기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가품이 잘 팔리는 소비 열기 속에 일부에서는 수년 전의 ‘정보기술(IT) 거품’을 떠올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신 삼종(三種)의 신기(神器)’=소비를 되살리는 데 불을 댕긴 주역은 디지털 카메라, DVD 리코더, 고화질(HD) TV 등 디지털 기기. 일본에서는 이 3가지 제품을 ‘신 삼종의 신기’로 부른다.

‘삼종의 신기’란 일본 천황가에 내려오는 3가지 보물로 황위 계승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빈사상태의 일본 경제를 살려낸 디지털 기기를 국가적 보물에 빗댄 것.

최근 홋카이도(北海道)의 한 소도시에서 신형 디지털 카메라 시연회를 가진 마쓰시타(松下)전기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을 겪었다. 준비한 카메라 34대가 순식간에 팔린 것.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디지털 붐과 상관없이 판매 실적이 영 좋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바뀐 것.

이날 판매 호조는 디지털 카메라와 함께 소개한 DVD 리코더 제품 ‘디가’ 덕분이었다. PC를 켜지 않아도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간단히 DVD에 저장할 수 있는 제품이다. 쉽게 다룰 수 있기 때문에 나이 든 고객도 거부감을 갖지 않은 게 판매 호조의 비결이었다.

▽민간소비 회복 추세=디지털 제품의 주도로 민간소비는 서서히 회복되고 있다. 올해 1·4분기(1∼3월) 민간 최종소비지출은 306조3541억엔으로 작년 4·4분기보다 1.0% 증가했다. 작년 1·4분기에는 전기 대비 1.2% 감소했으나 다음 분기에 증가세로 돌아선 뒤 점차 증가폭이 커지고 있다.

1·4분기 민간 최종소비지출은 국내총생산(GDP) 564조6116억엔의 54%. 민간소비가 일본 경제에서 절반 이상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 경제성장률 3.2%의 8할 이상은 민간소비의 공으로 분석된다. 올해에도 민간소비가 경제를 주도하는 추세는 계속되고 있다.

▽고가라도 좋다=일본 최대 전자제품상가인 도쿄(東京) 아키하바라(秋葉原). 이곳에 마쓰시타, 산요, 샤프 등의 고화질 TV 300대, DVD 리코더 180대를 동시에 진열해 놓은 대규모 디지털제품 종합판매장이 작년 말에 들어섰다. ‘안방극장’ 개념 아래 오디오를 포함한 가전제품 일체를 세트로 판매한다. 매장 관리인은 “요즘 가장 잘 팔리는 제품은 50만엔(약 500만원)∼60만엔(약 600만원)짜리”라고 말한다.

도쿄뿐 아니라 오사카(大阪), 나고야(名古屋) 등 대도시에서도 TV 판매장을 속속 대형화하고 있다.

플라스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혹은 액정표시장치(LCD) 모니터를 사용한 대형 고화질 TV 구입 붐은 작년 12월 지상파 TV의 디지털화 계획(2011년 완결 예정)이 발표되면서 본격화됐다.

도쿄시내에서 백화점 종업원으로 일하는 아오키 가오리(28)는 “0%에 가까운 초저금리에서 저축을 할 이유가 없다”면서 “보너스를 받으면 디지털제품 종합판매장으로 달려간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디지털 기기의 기능을 연결시키거나 새 기능을 덧붙인 고가제품으로 새로운 소비를 창출하고 있다. 소니가 최근 내놓은 ‘DVD 이용 디지털 비디오카메라’가 그런 종류다. 이 제품의 가격은 40만엔대로 주류를 이뤄 온 3만∼4만엔대 제품보다 월등히 비싸다. 세탁기, 에어컨, 식기세척기 등도 유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동안 ‘공짜는 기본’이었던 휴대전화도 고가품이 인기를 끈다. 디지털 카메라 화소 수에 버금가는 카메라가 달린 제품이나 TV 시청이 가능한 휴대전화를 중고교생들이 들고 다니는 모습도 드물지 않다.

▽새로운 거품?=다이어트용품, 성형미용, 피부관리 등 업종이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는 현상도 흥미롭다. 일본 여성들의 들뜬 소비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란 분석이다.

17일 일본 국세청이 발표한 고액납세자 랭킹에 따르면 1, 2위는 무명에 가까운 건강식품 판매회사 오너들이었다. 4위는 여성용 기능성 팬티 판매회사, 9위는 성형미용 클리닉이 차지하는 등 고액납세자 10명 중 4명이 미용과 건강 관련회사 소유주였다.

와세다(早稻田)대 야마키 가즈히코(八卷和彦) 교수는 “오랜 불황 속에 얼어붙었던 여성들의 소비심리가 건강을 촉매제로 폭발하고 있는 양상”이라면서 “전 업종으로 소비가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현재의 ‘디지털 경기’를 보며 수년 전 단명으로 끝난 ‘IT 거품’을 연상하는 시각도 의외로 뿌리 깊다.

2월 말 현재 일본의 실업자 수는 335만명, 실업률은 5.0%로 전월과 거의 비슷하다. 또 2월 말 현금 급여는 작년 2월보다 0.4% 감소했다. 기업의 실적 개선이 아직 개인소득의 증가로는 이어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가의 디지털 가전제품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소비 회복세가 본격적인 경기회복을 의미하는지의 여부는 더 기다려봐야 할 것 같다.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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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플레이션 수렁 10년만에 탈출?▼

일본 맥도널드가 햄버거 1개 값을 130엔서 절반인 65엔으로 낮춘 것은 1998년.

90년대 초 거품이 꺼지면서 시작된 경기침체와 소비 격감을 견디다 못해 가격을 내린 업체는 맥도널드뿐이 아니었다. 식품업계는 물론 거의 전 업종의 기업들이 출혈을 무릅쓰고 가격인하 전쟁을 벌였다.

해고와 명예퇴직, 보너스 삭감과 임금 동결도 일상사가 됐다. 경제성장이 거의 멈춘 가운데 물가가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디플레이션 속에서 일본 기업은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부터 전혀 다른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비가 살아나면서 속속 물가가 인상됐다. 맥도널드 햄버거 1개 값은 지난해 4월 115엔으로 올랐고 올해는 다시 123엔으로 올랐다. 6년 전 수준을 거의 회복한 셈이다.

일본 정부 관계자들과 경제계 인사들은 ‘탈 디플레이션’의 징후라며 소비자물가 오름세를 환영하고 있다.

‘물건 값이 오르면 기업 수익이 좋아진다. 기업은 종업원들의 급료를 올릴 수 있다. 급료가 오르면 소비는 더욱 증가한다….’

일본은 지금 이런 선(善)순환을 기대하며 ‘탈 디플레이션’을 고대하고 있다.

소비자물가지수 추이를 보면 지난해 3월에는 전년 동월 대비 0.6% 내렸다. 이때를 고비로 서서히 인하 폭이 줄어들었고 지난해 9월 마침내 상승세로 돌아섰다. 이후 0%대를 오르내리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일본은행은 20일 ‘금융경제월보’를 통해 “4월 소비자물가(신선식품 제외)지수 추이는 계절적 요인도 있어 전월 대비 제로에 가까운 상태이지만 앞으로 소폭의 마이너스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직 일본 경제가 본격적인 ‘탈 디플레이션’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확신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부 비관론자들은 올해 말까지는 소비 활황세가 이어지겠지만 내년 상반기부터는 다시 소비가 줄어들 것이란 우울한 예상도 내놓고 있다.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도쿄시내의 한 고화질 TV 매장. 일본 경제는 현재 고가의 디지털 제품에 대한 소비가 이끌고 있어 ‘디지털 경기’라고 불린다.-사진제공 아사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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