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흰 비너스…’ 佛 시인들 사로잡은 ‘불멸의 뮤즈’

  • 입력 2004년 4월 16일 19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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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여름 파리 뤽상부르 공원의 보들레르 석상 옆에 선 이가림 교수. 보들레르는 관능미 넘치는 흑백 혼혈 여인인 ‘검은 비너스’ 잔 뒤발, 파리 사교계의 여왕으로 ‘영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했던 ‘흰 비너스’ 사바티에 부인을 차례로 좋아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3년 여름 파리 뤽상부르 공원의 보들레르 석상 옆에 선 이가림 교수. 보들레르는 관능미 넘치는 흑백 혼혈 여인인 ‘검은 비너스’ 잔 뒤발, 파리 사교계의 여왕으로 ‘영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했던 ‘흰 비너스’ 사바티에 부인을 차례로 좋아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흰 비너스 검은 비너스/이가림 지음/262쪽 8000원 문학수첩

미와 사랑의 여신, 비너스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다. 눈부시게 흰 조각상과 신비로운 회화가 쉽게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은’ 비너스라니. 생경한 이미지가 아닐 수 없다. 단 한 권의 시집 ‘악의 꽃’으로 시문학사에 우뚝 선 보들레르는 마네 그림의 모델이 되기도 했던 흑백 혼혈의 여인 잔 뒤발을 ‘검은 비너스’라고 불렀다.
“괴상한 여인이여, 어두운 밤처럼 검붉고/사향과 하바나 뒤섞인 향기 풍기는/아프리카 흑인 마술사의 작품, 대초원의 파우스트/칠흑의 허리 가진 마녀, 캄캄한 한밤의 아이여.”

시인이자 불문학자인 이가림 교수(인하대)의 ‘흰 비너스 검은 비너스’는 시인들의 몸과 마음을 뒤흔들었던 불멸의 뮤즈들을 소개한다. 아름답고 달콤한 흰 비너스가 있는가 하면 씁쓸하고 치명적인 향기를 풍기던 검은 비너스도 있다.

이 책에는 7명의 시인이 나온다.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그들은 낭만주의의 거장인 라마르틴, 네르발, 뮈세, 그리고 상징주의의 대명사인 보들레르와 베를렌,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아폴리네르와 엘뤼아르다. 저마다 다양한 삶을 살았지만 한결같이 혼신의 힘을 다해 치열한 사랑을 나눴다.

제라르 드 네르발(1808∼1855)은 끊임없는 광기에 시달리면서도 여배우 제니 콜롱을 두고 “그녀 안에서 살고 있다”고 고백한 시인이다. 스스로 목매달아 죽기까지 마지막 2년 동안에 그 애정의 힘으로 ‘실비’, ‘환상시집’, ‘오렐리아’ 등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쏟아냈다.

폴 엘뤼아르(1895∼1952)는 첫 번째 아내 갈라를 향해 이런 시를 썼다.

“그녀는 내 눈꺼풀 위에 서 있다/그녀의 머리칼은 내 머리칼에 뒤엉키고/그녀의 손은 내 손과 같은 모양/그녀의 눈은 내 눈과 같은 색깔/하늘 위로 사라진 조약돌처럼/그녀는 내 그림자 속에 잠겨 사라진다/그녀는 언제나 눈을 뜨고 있어/나를 잠 못 이루게 한다/그녀의 꿈은 눈부신 빛으로 싸여/태양을 증발시키고/나를 울고 웃게 하며/할 말이 없어도 말하게 한다.”

알프레드 드 뮈세(1810∼1857)는 조르주 상드와의 치명적인 사랑을 통해 불후의 명작인 ‘밤’의 시편들을 탄생시켰다. 특히 ‘5월의 밤’은 상드와의 파탄이 있은 직후 쓴 것으로, 버려진 남자의 울부짖음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사투르누스 시집’을 쓴 폴 베를렌(1844∼1896)은 사촌누나에 대한 금지된 사랑으로 평생 고통스러워했다. 여인들마다 결실을 보지 못하고 이어지는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의 연애는 그로 하여금 짝사랑의 비가(悲歌)를 노래하게 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른다/우리의 지나간 사랑을/기억하고 있는가/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왔었다/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사랑은 간다 흐르는 강물처럼….”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정열적인 ‘시인들’도 아니고 그들로 하여금 기쁨과 고통을 이끌어낸 ‘그녀들’도 아니다. 위대한 업적으로 길이 남는 몇 편의 ‘시’도 아니다. ‘사랑’이다. 책장을 넘길수록 독자들로 하여금 자꾸만 일어나 서성이게 하고, 창밖에 시선을 던지게 하는 것은 책의 전면에 넘쳐 흐르는 ‘사랑’이다. 모든 길은 언제나 서로 마주치듯이 인간은 결국 사랑에서 비롯되고 또한 사랑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화사한 봄날에 펼쳐든 프랑스 시인들의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사랑의 감미로움과 위태로움을 다 같이 맛보게 할 것 같다.

허혜란 소설가·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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