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마쓰시타 회장 “인재만이 희망… 파벌-연줄은 가라”

  • 입력 2004년 3월 29일 17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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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마쓰시타(松下)그룹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介·1894∼1989) 회장이 만든 ‘마쓰시타 정경숙(政經塾)’이 올해로 개설 25년째를 맞는다. 이곳에서 배출한 현역 중의원 의원만도 28명. ‘일본 최고의 엘리트 양성소’를 취재했다.》

도쿄(東京)에서 전철로 한 시간 거리의 가나가와(神奈川)현 지가사키(茅ヶ崎)시. 마쓰시타 정경숙은 고대 그리스 건축양식의 정문과 유럽 중세풍 종루로 이뤄져 주변의 주택과 확연히 구분됐다.

“‘주쿠슈(塾主)’는 민주주의의 발상지 그리스를 염두에 두고 여기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싹이 트기를 원했습니다.”

안내 직원은 창립자인 마쓰시타 회장을 ‘주쿠(塾)의 주인’이라고 극진하게 불렀다.

1980년 4월 1일 1기생을 받은 이후 마쓰시타 정경숙을 거쳐 간 사람은 이달 졸업한 22기생(2001년 입교) 5명을 포함해 총 204명이다.

졸업생 중 지난해 11월 중의원(하원에 해당)의원 선거 출마자는 40명. 이 가운데 6선에 성공한 1기생을 비롯해 28명이 당선됐다. 무려 65%의 당선율로 ‘최고의 정치 엘리트 양성소’임을 입증했다.

매년 200여명이 지원하지만 10명 정도에게만 입학 자격이 주어진다. 22∼35세로 연령을 제한한다. 작년에는 여성 1명을 포함해 8명이 입학했다. 전체 과정은 3년. 가끔 탈락자도 나온다.

정규 강사진이 따로 없고 수업료도 없어 일반 학교와는 다르다. 입학생은 매달 20만∼25만엔(200만∼250만원)을 연수비 조로 보조받는다. 첫 1년은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홀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한다.

“정말 기나긴 1년이었지요. 내가 정말 정치인 자질이 있는가 하는 번민으로 죽고 싶을 때도 있었고요.”

며칠 뒤면 기숙사 생활에서 해방되는 1년차생 가미야마 요스케(神山洋介·29)의 회고다.

그는 명문사립 게이오(慶應)대를 나와 생명보험회사에서 4년간 일하다 중학생 때부터 꿈꾸던 마쓰시타 정경숙에 들어왔다.

하지만 ‘정치는 무엇이며 정치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끝없는 의문, 정치의 역할을 자각할수록 커가는 중압감으로 힘겨워했다. 이처럼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얻게 만드는 것이 이곳의 교육방침이다.

가문이나 재력, 정계 거물과의 연줄, 번듯한 학력에 힘입어 쉽게 당선되던 시절은 가고 정치 신인을 바라보는 유권자의 눈은 냉철해졌다. 마쓰시타 정경숙은 일본 전통을 강조하기 때문에 ‘보수의 기지’란 부정적 이미지가 남아있다.

그러나 일단 이곳 출신이라면 ‘크게 잘못될 사람은 아니다’는 신뢰감을 갖는 유권자가 많다.

쓰시타 정경숙 출신은 28명의 중의원 의원 말고도 2명의 참의원(상원의원에 해당)의원이 있다. 가나가와현 지사와 도쿄도 구청장 등 지방자치단체장도 5명이다.

광역자치단체 의원 14명, 기초자치단체의원 11명, 비서관과 참모 20여명, 경제연구소 연구원 7명, 신문사 문예지 등 언론인 10명, 도쿄대 등 9명의 대학교수도 배출했다. 회사원, 자영업 등으로 사회경험을 축적하며 정계 진출 시기를 관망하는 이도 많다.

지덕체 삼위일체의 교육방침에 따라 1년차 학생들은 정치관련 강좌와 연수 외에 100km 행군, 검도, 다도(茶道), 서도(書道), 참선을 한다. 창립자가 남긴 교훈을 조례시간에 낭독하고 ‘숙가(塾歌)’를 부른다.

중국 베이징 인근 마쓰시타 TV 브라운관 생산 공장에서 3주간의 실습도 필수과정이다. 지난해 한국 정치현장도 견학했다. 2, 3년차는 여름 겨울 합숙 때 외에는 현장에서 각자 과제를 실천한다.

교감 격인 후루야마 가즈히로(古山和宏) 연수책임자는 “창립자의 예견대로 ‘일본의 지도력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그럴수록 정경숙의 존재 의미는 더 커지고 있다”면서 “올해는 아시아 국가와의 역사인식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근현대사 과정을 추가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동양사상 등을 강의 중인 이광호(李光鎬·42) 연구원은 “치열한 경쟁 속에 맺어진 강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정경숙 출신들은 여야의 벽을 넘어 일본 정계의 중심세력으로 커가고 있다”면서 “한국 정치인과 비교할 때 정치에 대한 겸허함, 유권자에 대한 겸손함이 두드러진다”고 평했다.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마쓰시타의 철학▼

마쓰시타 정경숙이 문을 연 다음날인 1980년 4월 2일 설립자 마쓰시타 회장이 첫 강의를 맡았다.

“가장 먼저 제군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간 파악이다. 내가 성공한 것은 운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읽고 인재를 최대한 활용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전구회사 공원으로 사회에 뛰어든 그는 계열사 470개, 종업원 13만명의 그룹 총수에 오른 뒤에도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했다.

21세기를 이끌 지도자 양성에 필생의 뜻을 둔 그는 사재 70억엔(약 700억원)을 기부해 재단법인 ‘마쓰시타 정경숙’을 설립했다.

70년대 후반 일본사회가 고도성장 분위기에 취해 있을 때 그는 “물질적 번영의 이면에 국민정신은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올바른 양식과 이념 및 경영의 요체를 체득한 젊은이들이 정계, 재계 등 각계 지도자로 활약하지 않는 한 일본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일본의 번영과 평화뿐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에 공헌하는 지도자 양성을 강조했다.

만년에 그는 일주일에 한 번은 마쓰시타 정경숙 내 일본 전통 차실(茶室)에서 묵었다. 학생들과 차를 마시며 밤늦게까지 토론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가 묵었던 차실은 그대로 보존돼 현재 1년차생의 필수과목인 다도 실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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