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사랑의 중국…' 中문명사 키워드는 ‘혼혈과 잡종’

  • 입력 2004년 1월 30일 17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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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중국 문명사/장징 지음 이용주 옮김/336쪽 1만3000원 이학사

고대 중국에는 국가가 실행해야 할 아홉 가지 복지정책이 있었고 그 중 하나가 ‘독신자를 중매하는 것’이었다. 전국의 도시에 중매를 관장하는 관공서를 설치해 미혼 남녀를 맺어주었는데 이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매관(媒官)’이었다.

중매결혼은 서주시대(기원전 1020년 무렵)에 등장해 중원(中原)의 유교 문화가 성숙해짐에 따라 번성했다. 이에 비해 소수민족의 경우 아비와 자식이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등 ‘비(非)유교적’ 자유연애를 즐겼다.

저자는 풍부한 사료와 당대 문학작품들을 토대로 다양한 민족들이 대립하고 충돌하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한(漢)족의 중매제도와 소수민족의 자유연애가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중국의 문명을 만들어왔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남녀의 사랑을 처음 다룬 것은 당(唐)대의 문학이었다. 이 시기 중국은 실크로드를 통해 페르시아 인도 등과 활발한 교역을 벌였고 서역 여인들도 자연스럽게 중국으로 흘러 들어왔다. 중국인들은 서역 여인들의 자유로운 연애관에 영향을 받았는데 수도 장안(長安)은 향락 풍조가 특히 심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결혼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현종의 애첩 양귀비도 현종의 아들이었던 수왕(壽王)의 비였다.

송(宋)대로 이어지면서 중국인들은 다시 유교의 중매제도로 회귀한다. 북쪽의 유목 민족들이 한족을 격파하고 들어와 한족 여자들을 약탈하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약탈혼으로 한족들은 타민족의 문화를 혐오하게 됐고 그만큼 중매제도를 선진적 문화라고 생각하게 됐다.

저자는 사랑의 문명사를 훑으며 타 민족간 결혼에 의한 혼혈에 주목한다. 진(秦)이 천하를 통일한 후 청(淸)대에 이르기까지 341명의 역대 황제 가운데 이민족이거나 이민족의 피가 섞인 황제의 수가 179명으로 52.4%나 된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 문명이 정치적으로 분열을 거듭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통일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혼혈’이다. 한족은 끊임없이 다른 민족으로부터 새로운 피를 수혈받아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잡종(雜種)이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가 97년 만에 멸망한 이유도 지나친 민족문화 보호정책 때문이었다.

저자는 중국의 근대화가 지연된 이유도 ‘중체서용(中體西用·중국의 전통적 유교 도덕을 중심으로 서양의 과학기술과 문화를 도입하는 사상)’이라 하여 서구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인들이 서양 문화의 수용에 저항한 이유는 영국과 프랑스가 약탈 방화 학살을 일삼아 반감을 심어준 데다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문화를 능가하는 상위 문화를 접하고 곤혹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서구의 자유연애는 문화혁명을 가져왔다. 자식의 배필을 점지해주는 가장의 권위를 부정함으로써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붕괴시켰고, 부모에 등 떠밀려 결혼한 사람들은 이에 대한 반발로 배우자를 버리고 떠나 혁명에 가담했다. 한국과 일본의 경우처럼 중국인들도 자유연애를 통해 근대를 맞았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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