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카스피海 에너지 노려 親美정권 수립 후원한듯

  • 입력 2003년 11월 27일 1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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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오랜 친구’였던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전 그루지야 대통령을 권좌에서 밀어내면서까지 절박하게 지켜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시민혁명으로 셰바르드나제 전 대통령이 사임한 이면에 미국의 역할이 있었다는 의혹이 잇따라 제기되면서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의혹의 핵심은 에너지 패권. 카스피해(海) 에너지 확보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 지역에서 러시아를 따돌리고 패권을 굳히려는 미국의 전략이 이번 사태의 동인이었다는 분석이다.

그루지야는 과일과 포도주 외에는 별다른 자원도 없는 인구 550만의 가난한 소국.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는 최근 이곳에서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그루지야에 레이더기지를 갖고 있는 러시아군은 앞으로 10년 안에 철수할 계획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도 지난해 ‘대(對)테러 작전’ 지원을 명목으로 그루지야에 군사고문단과 특수부대를 파견했다.

미-러의 각축은 그루지야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 세계 최대 규모의 천연가스와 3위의 석유매장량을 자랑하는 ‘자원의 보고’ 카스피해에서 나온 석유와 가스를 유럽으로 운송하는 길목에 그루지야가 있다.

미국은 카스피해 연안의 아제르바이잔 유전에서 그루지야를 거쳐 흑해 연안의 터키 항구인 세이한으로 연결하는 길이 1760km의 바쿠∼트빌리시∼세이한(BTC) 송유관 건설을 주도하고 있다. 하루 100만배럴의 운송 능력을 갖춘 이 송유관은 2005년 개통될 예정이다.

미국은 송유관과 나란히 가스관도 건설하고 더 나아가 카스피해 해저를 통해 이 송유관을 카자흐스탄까지 연장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카스피해∼투르크메니스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인도양을 잇는 세계 최장의 에너지 공급망 구축도 꾀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현재 카스피해 북부에서 러시아를 통해 흑해로 이어지는 기존 송유관이 무용지물이 되면서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 지역에서 러시아는 영향력을 잃는다. 미국의 독주가 시작되는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이러한 거대한 ‘플랜’을 실현할 수 있는 첫 단계인 BTC 송유관의 성공적인 건설을 위해서 그루지야의 정국 안정과 친미정권 수립이 절실했던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결국 미국은 구소련 외무장관 시절부터 오랜 인연을 맺었지만 이미 민심이 떠난 셰바르드나제 전 대통령을 포기했다. 대신 이번 시민혁명을 주도하고 내년 1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이 유력한 미하일 사카슈빌리 국민행동당 당수를 선택했다. 미국 유학파인 사카슈빌리 당수는 러시아측의 우려를 살 정도로 친미 성향을 보여 온 인물이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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