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유엔 이라크결의안 좌초위기

  • 입력 2003년 10월 9일 15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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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치안 확보와 전후 재건에 필요한 병력과 자금을 더 많은 국가들로부터 지원받기 위해 미국이 추진중인 유엔 이라크 결의안이 좌초위기다. 또 이라크 문제를 거의 혼자서 처리해오던 미국의 일방주의도 거대한 암초에 부닥쳤다. 며칠 사이에 각국의 저항 또는 반대여론이 이처럼 표면화한 데는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한마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이 1일 '이라크에서 유엔의 역할을 다소 강화하고 가능한 한 신속히 이라크인들에 주권을 이양한다'는 내용의 수정 결의안을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할 당시엔 결의안 통과는 무난할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23∼24일 이라크 지원 공여국 회의 전에 결의안이 통과되기를 바란다"며 날짜를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7일 뉴욕 타임스 등 주요 언론은 "미국의 결의안이 심각한 저항에 직면하자 미국은 결의안을 철회할 것이냐, 표가 갈리는 양상이 나오더라도 표결을 통해 결의안을 밀어부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일제히 전했다. 8일에는 "진전은 없지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좌진의 말이 공개적으로 나오기도 했다.

며칠 사이에 이렇게 여건이 달라진 데는 아난 총장이 2일 새 이라크 결의안 논의를 위한 안보리 회의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미국의 새 결의안은 내가 권고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이라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힌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안보리 회의에서도 결의안이 유엔의 역할을 형식적으로 규정하고 주권이양 일정도 분명히 밝히지 않은데 대해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의안에 대해 찬반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던 안보리 이사국들이 아난 총장의 발언을 계기로 반대태도를 굳히게 됐다. 이로써 표결에 들어가면 전체 15표 중 결의안 통과에 필요한 9표를 얻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뉴욕 타임스는 "아난 총장의 발언으로 미국의 결의안이 지니고 있던 희미한 동력마저 사라졌다"면서 "이는 미국 관리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아난 총장은 유엔총회 연설에 이어 8일 미국 시민단체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미국의 일방주의와 선제공격론을 거듭 비판하고 "미국은 종전처럼 유엔의 틀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6일에는 "미국의 시민사회가 결정적인 순간에 일어서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표현으로 미국의 일방주의와 선제공격론에 저항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아난 총장이 미국과 마찰을 각오하고 이처럼 쓴소리를 하는 것은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시작할 때 확연히 드러났듯이 유엔의 다자주의와 집단안보체제를 부인하고 유엔의 기능을 무시하는 태도를 자주 보였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세계의 반대 여론이 높아가는 것도 그의 목소리를 키워주는 요소다.

아난 총장이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비위나 맞추려하지 않고 유엔 정신을 외치는 것은 그가 자신의 향후 거취를 분명히 결정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분석도 있다. 현재 65세인 아난 총장은 지난달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3년후 임기가 끝난 뒤엔 별다른 계획이 없으며 고국 가나에 돌아가 농사를 짓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유엔본부=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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