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WTO협상 결렬 보복 움직임]'힘의 무역' 회귀 예고

  • 입력 2003년 9월 17일 18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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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칸쿤에서 열렸던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결렬되면서 ‘힘의 논리’가 횡행하는 쌍무(雙務)협상 시대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선진국들의 ‘무력시위’에 맞서 개도국 진영의 버팀목이 돼온 WTO체제에 대한 무용론(無用論)까지 제기되고 있어 다자간 협상이라는 틀 자체가 깨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강대국, 쌍무협상의 칼 빼들 조짐=미국과 영국 외신들은 칸쿤회의 종료 직후 “협상 결렬은 ‘선동적인 언사와 자기몫 챙기기 전략’으로 일관한 개도국들에 있다”는 로버트 졸릭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의 발언을 주요 기사로 보도했다. 졸릭 대표는 “이제 쌍무적으로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할 것”이라고 선언해 나라별로 차별적인 무역정책을 취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때마침 미 상반기 경상수지 적자 누계액이 2773억7800만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는 상무부 발표가 15일 나오면서 미 업계의 분위기는 더 강경해지고 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라크 재건비용 탓에 최악의 ‘쌍둥이 적자’ 위기에 직면한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는 301조 및 반덤핑, 세이프가드 등 보복조치 발동을 무기로 쌍무협상을 최대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유럽연합(EU)도 다자간 협상에 주력했던 통상전략을 전면 재검토할 계획이다. 파스칼 라미 EU 무역담당 집행위원은 16일 “다자협상 틀에 남을지, 쌍무협상으로 돌아서야 할지 곧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내에선 연간 무역적자의 25%를 차지하는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WTO 무용론 대두=무엇보다도 만장일치제로 운영되는 WTO의 의사결정 과정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회원국들이 똑같은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지만 146개 회원국 중 한 나라만 반대해도 협상이 표류하는 ‘비효율’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는 비판. 미국 등 선진국은 무역비중에 따라 표결권을 달리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개도국들의 반발이 드세다.

아프리카 개도국들 역시 WTO 탈퇴론을 거론하고 있다. 아프리카연합(AU)의 비제이 마크한 무역산업경제담당 집행위원은 16일 “칸쿤회의는 가난을 없애고 생활수준을 향상시킨다는 선진국의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다”면서 “우리가 WTO와 함께 가야 할지 정치적인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는 16일 이런 기류를 반영해 “WTO가 대변해온 ‘세계화’가 한계에 이른 것 같다”고 평가했다.

▽다자틀 무너지면 개도국이 더 불리해져=전문가들은 WTO 다자협상이 내년까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붕괴할 경우 선진국과 개도국 모두 피해를 볼 것이라고 우려한다.

다만 선진국 경제는 쌍무협상을 통해 무역상대국을 일일이 상대해야 하는 절차상의 번거로움 및 시간과 싸우면 되지만, 소규모 개도국들은 해외시장 접근 자체가 봉쇄되는 극단적인 장벽과 맞닥뜨리게 된다.

한국의 경우 하이닉스반도체나 철강제품에 대한 미국의 상계관세 발동 등이 대표적 사례. WTO체제 덕택에 미국이 통상법 301조 등 더 강력한 보복수단을 발동하지 못했으며 기껏 발동하는 상계관세 등 불공정 무역행위도 WTO 제소로 일부 구제받을 수 있었다.

안덕근 한국개발연구원 국제대학원 교수는 “미국은 1995년 WTO 출범 때 내부적으로 ‘스스로 재갈을 물린다’는 반대여론이 컸다”면서 “칸쿤 협상도 기다렸다는 듯 결렬을 선언해 쌍무협상 시대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고 우려했다.


박래정기자 ecopark@donga.com

곽민영기자 havef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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