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랍일본인 사망 소식에 日 한때 “회담철수” 격앙

  • 입력 2002년 9월 18일 18시 15분


한 일본여성이 도쿄시내에서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들의 생사를 보도한 호외를 읽고 있다. - 도쿄로이터뉴시스
한 일본여성이 도쿄시내에서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들의 생사를 보도한 호외를 읽고 있다. - 도쿄로이터뉴시스
“일본 국민 8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런 상태에서 공동선언에 서명해서는 안된다.”(아베 신조·安倍晉三 관방부장관, 다카노 노리유키·高野紀元 외무성 심의관)

“그렇겠지? 어쨌든 김정일 위원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자….”(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17일 오후 1시경 북-일 정상회담이 열린 평양 백화원초대소의 일본대표단 대기실. 이날 오전 일본인 납치 피해자 8명(추가로 사망이 확인된 2명 포함)이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일본측은 한때 회담장 철수를 거론할 정도로 격앙됐다.

북한과 일본의 국교정상화 교섭 재개라는 역사적 성과를 이끌어낸 북-일 정상회담은 납치문제에 대한 일본대표단 내부의 의견이 엇갈리면서 자칫 결렬될 뻔했던 긴박한 순간을 맞기도 했다. 북-일 정상회담의 뒷얘기를 모아본다.

▽합의냐 결렬이냐, 긴박했던 순간〓고이즈미 총리가 일본인 납치 피해자들의 소식을 전해들은 시간은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의 회담을 30분 남겨둔 오전 10시30분경. 북한 외무성의 마철수(馬哲洙) 아시아국장이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아시아대양주 국장에게 전달했다.

다나카 국장은 고이즈미 총리 등에게 4명의 생존 사실을 보고했고 아베 부장관이 다른 사람들의 안부를 묻자 “그외에는 모두 죽었다고 한다”고 대답했다. 좌중에 침묵이 흘렀고 고이즈미 총리는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충격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고이즈미 총리가 초대소 현관에서 김 위원장과 만났을 때 굳은 표정으로 악수만 나눈 것은 이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 오전 회담이 끝난 뒤 북한측은 점심식사를 함께 하자고 제의했지만 일본측은 이를 거부하고 미리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일본 대표단은 결국 북한측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 없으면 국교정상화 교섭 재개에 합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결렬 위기에 몰렸던 회담은 김 위원장이 오후 회의에서 납치를 공식 인정하고 사과함에 따라 재개됐다.

▽철통같은 경비〓이번 회담을 전후해 북한측이 보여준 삼엄한 경비체계에는 일본측도 혀를 내둘렀다는 후문.

북한측은 외교관례를 무시하면서까지 정상회담이 어느 회의장에서 열리는지를 회담 당일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나마 통보된 회의장도 회담 몇 분 전 갑자기 바꿀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썼다. 초대소에는 이중의 검색대가 설치됐고 일본측 대표단 중 소지품 검사를 받지 않고 현관으로 들어간 사람은 고이즈미 총리와 아베 부장관뿐이었다.

▽“천운을 만난 고이즈미”〓회담 성과를 둘러싸고 일본 내에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본의 역대 총리들은 한결같이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을 부러워하고 있다고 일본 언론이 전했다.

일본 총리의 평양 방문은 전임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 때부터 추진돼 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 외교소식통은 “모리 전 총리는 북한측과 선이 닿는 재미 한국인 사업가를 통해 물밑 접촉을 벌였지만 납치문제에 대해 북측이 시치미를 떼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며 “여러 측면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운도 좋고 과감했다”고 말했다.

도쿄〓이영이특파원 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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