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인 미국바로보기]이혼 많지만 재혼도 많다

  • 입력 2001년 11월 27일 18시 29분


믿거나 말거나 미국에서 피자 배달 주문이 가장 많은 때는 추수감사절 전날이다. 음식 준비로 힘든 추수감사절 당일을 위해 하루 전에는 대개 ‘시켜 먹는’ 것이다. 우리의 추석처럼 미국의 추수감사절도 모처럼 가족이 모이는 날이다. 비록 테러 사건과 여객기 추락사고 이후 가족을 찾는 발길은 예년에 비해 무거워졌지만 가족을 찾는 마음만은 올해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가족주의’ 예상 밖 튼튼▼

뜻밖에도(?) 미국인은 대단히 가족주의적이다. 미국인들이 인생의 행복을 무엇보다 가족에서 가장 많이 찾고 있다는 사실은 다양한 설문조사에서 변함없이 확인된다. 미국은 근대 산업국가들 가운데 결혼하는 성인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법률혼이든 사실혼이든 관계없이 미국인들은 결혼을 통한 가족 구성에 대단한 집착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신세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미국의 견고한 가족주의 문화는 흔히 이렇게 설명된다. 우선 청교도적 신앙공동체로부터 출발한 미국에서 공공정신과 시민의식이 점차 약화되는 동안 가족주의가 이를 대체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소위 미국적 규범의 3대 지주, 곧 ‘하나님, 가정, 그리고 조국’ 가운데 가정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짧은 역사 탓에 사회적 친교를 위한 연고주의가 별로 축적되지 않은 결과 가족에서 자기 정체성과 정서적 위안을 찾는 삶이 보편화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사실상 미국에서는 퇴근 이후 우리나라 술집과 같이 ‘날 오라고 부르는 즐거운 곳’이 거의 없다. 그저 ‘홈 스위트 홈’인 것이다.

그렇다면 막상 미국 사회의 높은 이혼율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현재 미국에서는 결혼하는 세 쌍 가운데 하나 정도가 파경으로 끝나고 있으며 머지 않아 모든 혼인의 절반 가량이 이혼으로 귀착될 전망이다. 하지만 높은 이혼율이 결코 가족주의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혼에 의한 가족 해체가 대부분 재혼을 통한 가족 재구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혼에 실패한 사람들 가운데 약 70%가 재혼에 임하고 있으며, 재혼의 반 가량은 이혼 후 3년 안에 이루어진다. 재혼을 전제로 하는 이혼은 가족제도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상 미국에서 이혼이란 별로 심각한 일이 아니다. 미국 최초의 이혼 기록은 1639년까지 올라가는데 당시 청교도들은 불행한 결혼이 신앙공동체 건설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다. 독립전쟁 무렵 토머스 제퍼슨(3대 대통령)은 ‘자주와 행복’의 원칙을 들어 이혼의 자유를 옹호했고, 과부와 결혼한 앤드루 잭슨이 백악관의 주인이 된 것은 1832년의 일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 평균 수명의 증가 및 이혼 절차의 간소화에 따라 이혼율은 더욱 더 높아지게 되었는데 1800년대 후반 이후 지금까지 미국의 이혼율은 세계 정상의 자리에서 한번도 내려온 적이 없다. 이혼을 ‘미국적 전통’으로 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높은 결혼율과 높은 이혼율, 그리고 높은 재혼율은 결국 미국에서 부부 단위의 가족 생활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일관되게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같은 가족주의 문화라고 해도 유교적 전통이 부자 중심이라면, 미국의 경우에는 다분히 부부 중심이다. 이 때 가족 관계의 핵심적 요소는 당연히 성애(性愛)를 위주로 하는 로맨틱한 사랑이다. 가족을 대체할 만한 사회적 관계가 별로 없는 조건, 그리고 조기 자립 문화 및 넓은 영토 탓에 부모나 형제 등 다른 가족 구성원들과의 교분이 흔치 않은 상황을 가정해 보라. 로맨틱한 사랑의 소멸은 곧장 이혼으로 직진할 수밖에 없고 이혼은 즉각 재혼으로 U턴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혼자 70% 다른 짝 찾아▼

혹시나 미국의 ‘자유 분방’한 가족 문화를 여성 해방의 지표 내지 문명화의 척도로 간주한다면 크나큰 착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미국 나름의 역사적 전통과 사회 구조를 반영할 뿐 우리 사회의 이상적 모델이 되기는 어렵다. 게다가 잦은 이혼과 흔한 재혼이 초래하는 심리적 비용과 사회적 손실은 미국 내에서도 큰 고민거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전통이 소중해서가 아니다. 대다수 미국인들의 인생에 있어서 이혼과 재혼은 초혼만큼 필요하고 절실하기 때문이다.

(한림대교수·현 워싱턴대 교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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